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0일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에 쓰일 예비비 360억원의 세부 내역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헌법과 국가재정법 규정에 따라 내년에 국회에 제출한다는 입장으로, 정부가 법 조항을 임의로 해석해 내역 공개를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추진하는 핵심 사업에 대한 예산 감시가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기획재정부로부터 받은 서면 답변서를 보면, 기재부는 ‘윤 당선인 집무실 이전 예비비 상세내역’ 요구에 “예비비 지출은 헌법 및 국가재정법에 따라 차기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돼있다”며 “당해연도의 예비비 편성·집행 내역 공개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헌법 제55조는 ‘예비비는 총액으로 국회 의결을 얻어야 하며, 예비비 지출은 차기 국회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국가재정법 제52조는 ‘정부는 예비비로 사용한 금액의 총괄명세서를 다음연도 5월31일까지 국회에 제출해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기재부는 이를 근거로 “다음연도에 전년도 예비비 집행내역을 작성해 국회에 제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지난 6일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집무실 이전 예비비 360억원 지출안의 세부 내역을 올해 안에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힌 셈이다. 기재부는 의결 당일 보도자료를 내고 위기관리센터·경호종합상황실 등 안보 필수시설 구축(116억원), 일반 사무실 공사비 및 전산서비스 시스템 구축(101억원), 국방부 청사 이전(118억원), 대통령 관저로 사용될 육군참모총장 공관 리모델링(25억원) 등 예비비 사용처를 큰 틀에서만 밝혔다.
기재부가 예비비 세부 내역 비공개 근거로 헌법 제55조와 국가재정법 제52조를 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10월 ‘2022년도 예산안 위원회별 분석’ 자료에서 “해당 법 조항들은 정부가 예비비 사용에 대해 차기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지, 당해연도 예비비 사용의 기밀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기재부가 법 조항을 임의로 해석해 예비비 지출 내역을 제때 공개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통상 예비비는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재난·재해 등 시급한 국가적 대응이 필요한 영역에 투입된 만큼 지출을 둘러싼 논란이 크지 않았다.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되는 본예산이나 추가경정예산 등과 달리 사후에 국회 승인을 받도록 한 것도 이러한 취지다. 그러나 윤 당선인의 정치적 결정으로 추진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현 정부와 차기 정부, 여야 간 대립으로 비화됐다. 더군다나 윤 당선인 취임일(5월10일) 전까지 이전을 완료한다는 방침에 따라 예비비가 쓰이고 있는 터라, 세부 지출내역을 공개해 외부 검증과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정치적으로 입장이 갈리는 사안이나 정부의 중점 과제를 예비비로 추진한 경우는 없었다”며 “정부는 집무실 이전 예비비가 실제 어떤 식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국회에 제출해 국민들이 알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부가 생산한 모든 문건은 공개가 원칙”이라며 “기재부는 헌법과 국가재정법 조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우원식 의원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라는 중요한 국가 정책 추진에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은 문제”라며 “정부 예비비가 외부의 감시를 받지 않고 쓰이는 쌈짓돈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