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온라인 중고 마켓에서 피아노 매물을 보는 일이 낯설지 않다. 상태 좋은 악기도 있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올라와 있거나 운송비만 내고 가져갈 수 있는 낡은 피아노도 눈에 띈다. 그 피아노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던 차, 얼마 전 그들의 행방을 알게 됐다. 몇몇 조율사들이 그런 피아노를 찾아가 여전히 쓸 만한 것들을 고르고, 누군가 폐기물로 처리한 피아노를 수거해와 이리저리 고쳐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피아노들은 이름 없는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드물게나마 중고 피아노를 구하는 구매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된다고 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우리 집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오던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나는 이 악기와 더불어 그럴싸한 미래를 함께 선물받은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하던 엄마의 꿈이 나에게로 전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동네마다 한두 개씩 꼭 있던 피아노 학원에서 꽤 즐겁게 음악을 배우던 나를 위해, 할아버지는 퇴직 후 조금씩 모은 돈을 피아노와 맞바꿨다. 그렇게 나는 동네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에 동참하며 음악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고 끝끝내 음악을 전공까지 했지만, 20년도 훌쩍 지난 지금은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않게 됐다. 피아노는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는 큰 가구로 탈바꿈했다. 꼭 우리 집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20년 전 또래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울 땐 묘하게 낙관적인 환상이 감돌았던 것 같다. 피아노를 치는 것만으로도 좋은 미래가 보장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고, 피아노의 위상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사실은 우리 때나 유행했던 악기였던 것 같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피아노를 함께 쳤던 친구들과 주고받게 됐다. 역시 피아노가 세상에 너무 급격히 많아졌던 걸까. 지금은 길을 걷다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로 생경한 일이 됐다.
피아노의 존재감이 삶 속에서 흐려질 때쯤, 다시 한번 이 악기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음악가 김재훈이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긴 호흡으로 만들고 있는 <김재훈의 P.N.O>는 ‘피아노’를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이 프로젝트는 수많은 피아노 음악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 이면에 놓여 있던 피아노라는 대상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국에서 이 악기가 지녀온 의미를 역추적한다. 근대적 삶의 징표이자, 때로는 부의 상징이자, 온 집안이 즐길 수 있는 ‘가정음악’을 대변하던 악기이자, 어린이를 위한 음악 교육도구로 자리해온 이 피아노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담아왔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 리서치를 바탕으로, 이 프로젝트는 피아노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 한국 땅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오던 날의 이야기, 지금 피아노들이 수거장에 모여 있는 풍경, 다 함께 피아노 학원에서 체르니를 연습하던 순간, 이 수많은 피아노의 제작 토대가 된 대량생산 시기, 그리고 피아노를 바탕으로 새로운 악기를 만든다면 어떤 형태가 될지 상상해보는 장면까지. 프로젝트는 피아노의 과거와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현재를 상상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상상 속의 피아노를 고루 엮는다. 코끼리 상아로 건반을 만들었던,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역사도 분명히 언급하지만 피아노였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순간 또한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한차례 쇼케이스 공연을 마쳤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피아노라는 대상을 입체적으로 재고하면서도 이 악기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정한 마음으로 회고할 수 있게 됐다. 피아노를 둘러싼 기억들이 또 하나의 음악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지금 우리의 피아노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