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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사진복원 작업을 수십년 동안 해오고 있는 김찬곤씨.

'생긴 모습 자연스럽게' 당신의 얼굴을 고쳐드립니다

■ 드로우 투 해븐’, 환한 얼굴 남겨주는 초상화 전문가 김찬곤씨

초상화·사진복원 작업을 수십년 동안 해오고 있는 김찬곤씨.

초상화·사진복원 작업을 수십년 동안 해오고 있는 김찬곤씨.

‘얼굴 예쁘게.’

빛바랜 사진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1994년 10월 찍힌 이 사진의 주인공은 흰머리를 한 여성이다. 그는 차 뒷 좌석에 앉아 비스듬히 카메라를 바라봤다. 종이에는 ‘옆·뒷 머리 커트’ ‘저고리’ 같은 요구사항들이 잘 보이게 적혀있다. 초상화·사진 복원 전문가인 김찬곤씨(65)는 사진을 서류봉투에 넣어 책상 한켠에 뒀다. 그곳에는 이런 서류봉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김씨가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모니터엔 구겨지고 찢어진 자국이 선명한 사진이 보였다. 왼손은 키보드에, 오른손은 마우스를 대신한 타블렛 펜을 쥐고 쉼 없이 움직였다. 그는 언제 찍혔는지 알 수 없는(“1960~70년대쯤 찍혔나…”) 사진을 띄워놓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따로 찍힌 노부부의 사진을 나란히 앉아 함께 찍은 듯한 사진과 영정사진으로 편집하는 중이다. 심하게 찢기고 구겨진 여성의 사진에 손이 더 많이 갔다. 김씨는 이걸 “초상화 작업”이라고 했다.

구겨지고 찢어진 오래 전 사진(왼쪽)을 깨끗하게 보정하고 있는 작업 장면. 김찬곤씨는 오래전 사진은 사진의 재질에 따라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더 손이 많이 간다고 했다.

구겨지고 찢어진 오래 전 사진(왼쪽)을 깨끗하게 보정하고 있는 작업 장면. 김찬곤씨는 오래전 사진은 사진의 재질에 따라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더 손이 많이 간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신설동역 로터리에 있는 ‘흑백사진관 우리들’. 사진관 곳곳에는 최근에 찍은 듯한 ‘흑백 셀프사진’과 역사 속 인물들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김씨가 작업한 초상화들이다. 이 사진관을 연 건 2년 쯤 전이다. 이전엔 초상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화실을 운영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주문이 뚝 끊겨 주변에 물어물어 사진관을 열었다.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주문이 4분의1로 줄었다. 예전에 연간 400건씩 했다면 이제는 100건도 못한다. 코로나19가 아니어도 점점 일감이 줄어드는 중이다.

사진관 안의 작은 골방이 작업실이다. 그가 만든 초상화는 대부분 영정사진으로 쓰인다. 효도사진이나 장수사진이라고 불리지만 대부분 노인들이 직접 자신의 사진을 맡긴다. 장례식장에 놓일 영정사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할까, 자식들이 낭패를 보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인이 된 (조)부모의 사진을 초상화로 간직하기 위해 찾는 이들도 있다.

주문을 받으면 우선 스캐너로 사진을 입력한다. 찢기고 구겨진 사진의 흔적을 없애는 게 먼저다. 주문에 따라 군복, 한복, 드레스 등 옷도 입혀준다. 얼굴에 색을 입히고 힘 없는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도 풍성하게 채워넣는다. “옛날 노인분들은 사진기 앞에서는 표정이 굳잖아요. 그걸 약간 웃고 있는 얼굴로 바꿔주는 거지….” 그의 두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모니터 속 얼굴은 환하게 미소짓기 시작한다.

서울 종로구 종로5가 광장시장 인근에서 외무사원 이용하씨가 운영하는 영업용 노점. 이씨는 아버지가 3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운영한 노점을 최근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종로5가 광장시장 인근에서 외무사원 이용하씨가 운영하는 영업용 노점. 이씨는 아버지가 3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운영한 노점을 최근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다.

“밖에서 영업하는 외무사원들이 주문을 받아서 가져온 거죠.” 김씨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외무”들은 수십개의 샘플 사진에 번호를 매겨두고 머리 모양, 옷 등을 고를 수 있게 해준다. 의뢰를 받은 원본사진과 요구사항을 적어 서류봉투에 담는다. 초상화 한 장에 크기에 따라 액자 포함 5만~10만원쯤 한다. 외무들은 수수료를 일부 받고 김씨에게 작업을 맡긴다. 프리랜서 영업사업원인 셈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다니는 시장 인근 지하철역 ‘구두방’ 같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주문을 받기도 한다.

이날 김씨에게 맡겨둔 사진을 찾으러 온 ‘외무’ 이용하씨는 종로5가 광장시장 주변에서 영업용 노점을 운영한다. 노점에는 ‘초상화, 영정사진 주문제작’ ‘가족사진, 결혼사진, 돌사진, 사진복원’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각종 샘플 사진이 놓였다. 이 자리는 이씨의 아버지가 30년 넘게 운영해오던 곳이다. 이씨는 아버지가 최근 코로나19로 사망하면서 일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김씨와 인연을 맺었다.

■포토샵 4.0으로 만드는 세상

김씨가 처음 일을 시작한 건 1970년대 말이다. 처음엔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학교에선 낙서 솜씨가 빼어난 학생으로 꼽혔다. 한 만화가 밑에서 인물이나 배경의 밑그림을 그리는 ‘펜터치’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함께 그림을 시작한 지인이 초상화 업계로 가면서 길을 옮겼다.

당시엔 펜과 붓으로 그리는 초상화 작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동대문 일대에 10여곳의 화실이 있었다. 사진관이 지금처럼 흔치 않았고, 쉽고 저렴하게 여러 장의 사진을 인화할 수 없어 그림으로 그린 초상화가 영정사진 등의 용도로 많이 쓰였다.

그때는 60~70대 노인들이 소중히 보관한 낡은 사진을 건네며 초상화를 부탁했다. “요즘은 80대가 되도 ‘곧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때는 어르신들이 미리 자기 장례를 준비하고 그랬죠.” 전국 곳곳에서 주문이 들어왔고, 하루에도 수십개의 그림을 그려야 했다. 종로 일대에 화실이 많았고, 화실마다 초상화 작가들도 넘쳤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하는 사람은 이제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1996년쯤 컴퓨터가 보급되며 작업 환경이 달라졌다. “처음엔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화실에서 큰 돈을 들여 컴퓨터로 작업을 시작해 쉽고 빠르게 초상화가 제작되니까 다들 시작했지.”

사진·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이 쓰였다. 김씨는 지금도 포토샵 두 개 버전을 왔다갔다 하며 쓴다. 하나는 포토샵 4.0(1996년 발표), 하나는 7.0(2002년 발표). 모두 출시된지 오래됐지만, 그 중에서도 더 오래된 4.0 버전을 주로 쓴다.

“오래 써 손에 익었잖아요. 새로 배우고 하면 단축키도 다 외워야 하는데, 오래 되다 보니 바꾸기가 어렵네.” 그가 사용하는 장비들도 손때가 오래 묻었다. 타블렛 펜 중에는 20년 넘게 쓴 것도 있다. 하루종일 붙잡고 수십년을 썼더니 펜의 손잡이 부분이 닳고 닿아 녹은 것처럼 보였다.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직도 쓰는 것”이라고 했다.

20년 넘게 쓴 컴퓨터용 타블렛 펜 손잡이 부분이 손의 열기로 녹은 것처럼 보인다. 김찬곤씨는 마우스 대신 사용하는 이 펜을 아직도 쓰고 있다고 했다.

20년 넘게 쓴 컴퓨터용 타블렛 펜 손잡이 부분이 손의 열기로 녹은 것처럼 보인다. 김찬곤씨는 마우스 대신 사용하는 이 펜을 아직도 쓰고 있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일을 해오다 보니 특별한 초상화 의뢰를 받는 일도 있다. 한 번은 조상을 그려달라는 어떤 종친회의 부탁을 받았다. 문제는 견본으로 삼을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친 중 유명인들의 사진을 구해 얼굴형의 공통점을 찾아 그림을 그리고, 검토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고려·조선시대의 관직을 지낸 조상을 그려 달라하면, KBS의 의상실을 찾아가 해당 관직의 의복 문양을 스케치했다.

오래 전 그 유명한 김두한과 어울려 힘 좀 썼다는 한 노인의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기골이 장대한 노인은 아내와 겸상도 안 한다는 고루한 자였는데, 자신의 어머니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문제는 사진이 남은 게 없어 몽타주를 그리듯 노인의 설명을 서울역 뒷편의 어느 찻집에 앉아 하루 종일 듣고 초상화를 그렸다.

김찬곤씨는 다양한 초상화 작업을 받기 때문에 먼 옛날 조상의 영정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한다.

김찬곤씨는 다양한 초상화 작업을 받기 때문에 먼 옛날 조상의 영정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한다.

■얼굴만 쳐다 본 수십년…“좋은 얼굴 따로 없다”

수십년을 다른 사람을 얼굴(사진)을 바라보고 고치는 일을 하니 직업병이 생겼다. 버스를 타면 ‘저 사람은 눈이 비대칭이네’, ‘입이 비뚤어졌네’ 하면서 머릿속으로 얼굴을 고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가던 남자나 여자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애인과 싸웠다는 에피소드는 초상화 업계에선 흔한 얘기다.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다면 의뢰 받은 사진에 맞게 충실하게 작업한다. 과도하게 얼굴을 멋지고, 이쁘게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생긴 모습을 자연스럽게 살리려고 한다. 셀 수 없는 얼굴을 바라보고 살았지만 어느 순간 ‘좋은 얼굴이란 게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모습이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날 때가 좋은 얼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초상화 작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자부심도 느끼지만, “계속 이 일을 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냥 좀 아둥바둥 먹고 살았는데, 이 일 그만두고 더 잘 사는 사람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렇다고 차마 막상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지는 못했다

1980년대 말쯤에는 한 번 붓을 꺾은 적이 있었다. 그가 일하던 화실의 사장이 김씨 몫을 과도하게 떼어갔던 게 이유다. “돈 때문이 아니라 초상화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하잖아.” 화실을 떠나 공사장에서 일을 하면서 떠돌았다. 결국 다시 생계를 위해 돌아왔다. 3년 동안 친구 하나 만나지 않고 직접 차린 화실 운영에만 매진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오게 됐다.

“증명사진 찍을 수 있어요?” 월요일 오후, 급하게 전화를 걸고 찾아온 젊은 커플이 사진관으로 들어왔다. “이걸로 먹고 사는 거야. (초상화) 명맥이으려고.” 김씨는 카메라를 챙겨 나가며 농담처럼 말했다. 취미 삼아 시작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능숙하게 보정 작업을 마쳤다. “실물이 잘 생겨서 사진이 잘 나왔네.” 젊은 커플이 만족한 표정으로 사진관을 떠났다. 김씨는 다시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봤다. 빛바랜 사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찬곤씨가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하는 모습을 촬영해 빠르게 재생했다.

김찬곤씨가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하는 모습을 촬영해 빠르게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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