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본사를 둔 유럽 최대 음식 배달 플랫폼 딜리버루가 배달원의 ‘노동자’ 지위를 둘러싼 법정 다툼에서 패했다. 프랑스 법원은 딜리버루가 수천명의 배달원들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로 사용하면서도 이들을 프리랜서로 간주해 노동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유죄을 선고했다.
파리형사법원은 19일(현지시간) 2015~2017년 수천명의 배달원들을 노동자로 등록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딜리버루 프랑스에 최대 37만5000유로(약 5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해당 기간 딜리버루 프랑스에서 근무한 전직 임원 2명에게는 징역 1년형의 집행유예와 함께 벌금 3만유로(약 4000만원) 또 다른 임원 1명에게는 징역 4개월형의 집행유예와 벌금 1만유로(약 1300만원)를 선고했다. 또 딜리버루 프랑스와 3명의 임직원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노동총연맹(CGT) 등 5개 노동조합에 5만유로(약 6700만원)씩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배달원들은 플랫폼인 딜리버루와 계약한 독립된 자영업자들이라는 딜리버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중개 역할에 머무는 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와 달리 딜리버루의 경우 배달원과 플랫폼 사이에 영구적인 종속관계가 있다고 봤다. 감시와 통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 판결에 따르면 딜리버루 배달원들은 배달복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며 활동하기 전에 사내 교육을 받았다. 배달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 배달원을 확보할 수 있게끔 긴 배달 시간을 배당했고, 이를 거부하면 다음 몇 주간 배달을 맡기지 않는 식으로 불이익을 줬다. 배달료를 올려받으려면 일정 시간 온라인에 접속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이 같은 사항을 딜리버루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법원은 딜리버루가 배달원들을 노동자로 간주해야 했다고 봤다. 배달원들의 실적을 감시해 교대에 늦거나 배달에 지각하면 벌점을 매기고 메시지로 통보했다는 점 등도 판결의 근거가 됐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노동의 사용은 노동자를 등록한 사용자와의 불공정 경쟁을 유발한다”며 “종속관계에 있고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딜리버루 배달원과 같은) 위장 자영업자는 등록된 노동자와 같은 조건으로 사회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배달원들을 노동자로 등록하지 않으면 플랫폼 측은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사회보장기여금 등을 아낄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적한 것이다. 딜리버루가 노동자 미등록으로 절감한 사회보장기여금은 2015년에 96만4000유로, 2016년에 546만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파브리스 앙제이 CGT 대표는 “법원이 재량 내 최고 형량을 선고한 강력한 판결”이라며 “딜리버루의 비정규직 노동 사용에 대한 첫번째 유죄판결이다. 역사적 판결”이라고 말했다.
택시 앱 우버로 시작된 플랫폼 노동을 둘러싼 논쟁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지위에 대한 법적 판단은 엇갈리지만 플랫폼 노동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각국 정부들이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스페인 정부가 딜리버루, 우버잇츠 등의 모든 플랫폼 배달원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노동법 개혁을 단행하자 딜리버루는 지난해 11월 스페인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유럽연합(EU) 의원들은 플랫폼 노동자에게 공동의 노동조건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U 제안서에 따르면 프리랜서로 분류되던 172만~410만명의 플랫폼 노동자들의 지위가 노동자로 재분류될 수 있다. 영국은 7만명의 우버 운전자에게 최저임금과 유급휴가 및 연금 기금을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샐러리맨’ 지위를 부여했다.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에서는 플랫폼 노동 사용을 규제하는 의회 이니셔티브가 활동하고 있다. 앞서 파리산업법원은 정규직 전환 요구를 거부당한 배달원에게 딜리버루가 3만유로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배달원은 노동자라고 판단했지만 항소심에서 뒤집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우버와 리프트 등 차량공유업체 기사들은 자영업자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딜리버루는 이날 프랑스 법원의 결정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항소를 고려하고 있다는 밝혔다. 딜리버루 대변인은 “독립적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배달 파트너의 기대에 더 부합할 수 있도록 사업 모델을 발전시켜왔다”며 “파트너들도 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