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오만과 편견](https://img.khan.co.kr/news/2022/04/27/l_2022042701003195800298752.jpg)
밤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사건의 보도로 아침 뉴스가 시작된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주로 우크라이나의 공식적인 보도나 난민의 증언으로 전쟁의 참상이 시각매체를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선 서방 측에 중무기의 지원을 요청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이런 요청에 적극 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이해’를 둘러싼 논쟁도 심심치 않게 나돈다. ‘러시아 이해’는 단어 그대로 러시아를 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푸틴의 러시아’를 옹호하는 태도를 비판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비판의 표적이 된 독일 정치인 가운데는 푸틴과 관계가 좋았던 전 총리 슈뢰더와 메르켈은 물론, 전 외무부 장관이자 현직 대통령인 슈타인마이어도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정부가 슈타인마이어를 기피인물로 취급, 국빈예우를 취소했기에 독일과 우크라이나 관계는 상당히 냉랭해졌다. 유럽연합의 핵심인 독일에 대한 이런 우크라이나의 태도는 나름대로 노력하려는 독일에 대해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사태의 시작과 함께 러시아 군대가 사용하는 암호문자 ‘Z’를 독일 내에서 사용하는 행위도 폭력을 미화하거나 이를 선전하는 행위로 규정, 법적으로 문제 삼고 처벌하려는 독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1980년대 말 서독 ‘제1 공영방송’의 모스크바지국 책임자를 지냈던 여류 언론인 가브리엘레 크로메-슈말츠가 2015년에 낸 베스트셀러 <러시아 이해>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투쟁과 서방의 오만’이라는 다소 도전적인 부제를 달았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냉전기를 거치면서 대립각을 세웠던 러시아와 독일은 서로 선과 악의 세계로만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특히 서방의 언론이 이러한 시각을 더욱 경고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유럽이 강국들의 싸움터가 되지 않으려면 러시아는 유럽의 동반자이며, 이를 위해 정파적인 이익이나 오래된 인습과 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도덕적이며 역사적인 책무라고 주장한다.
선악 세계관 갇힌 ‘러시아 이해’
그러나 이런 러시아 이해는 오히려 ‘푸틴 이해’라는 비판이 따른다. ‘러시아 이해’라는 이름으로 푸틴을 비판하는 비정부단체도 적지 않게 활동하는 까닭에 러시아를 이해하는 문제는 여전히 선과 악으로 갈라진, 적대적인 세계관 속에 갇혀 있다.
사실 이 논쟁의 뿌리는 깊다. 러시아가 과연 유럽에 속하느냐는 질문은 이의 핵심이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근대 문명의 요람지인 유럽에 속할 수 없는, 계몽되고 문명화되어야만 하는 ‘반동의 소굴’로 취급되었다. 가령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프랑수아 기조(1787~1874)의 <유럽 문명사>는 러시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유럽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아시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카를 마르크스도 러시아에 대해 ‘반(半) 아시아적인 야만’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역설적이지만 나폴레옹(1812)과 히틀러(1941)가 구상한 유럽 문명에 의한 러시아의 해방이라는 커다란 꿈은 엄동설한의 모스크바에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유럽과 러시아를 문명과 야만으로 갈라 보는 대립적인 구도 설정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저술가인 아스톨프 드 퀴스틴(1790~1857)의 <1839년의 러시아>가 있다. 당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던 이 책보다 4년 앞서 출간된, 역시 프랑스 외교관 출신이었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지구상에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같은 목적을 향하는 두 위대한 인민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인과 앵글로-아메리칸’이라고 썼다. 이에 자극을 받아 남긴 여행기였기에 그는 ‘러시아의 토크빌’이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도 문제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과는 달리 퀴스틴은 수미일관 러시아를 부정적으로 묘사했기에 10월혁명 때까지 그의 책은 러시아에서 금서에 속했다. 그는 절대왕정인 러시아에서 거물이나 속물을 막론하고 모두 노예제로 말미암은 환각상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때로부터 한 세기를 훨씬 넘겨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을 주도한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1904~2005)은 ‘퀴스틴의 저작은 1839년의 러시아에 관해서는 썩 좋은 책이 아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 관해서는 최고의 책이며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의 러시아에 관해서는 나쁜 책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이렇게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를 이루었지만 이와는 달리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본 흐름도 있었다. 하나의 예로 니체는 휴지(休止)를 모르는 유럽과 미국의 문명이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러시아 농민과 아시아인의 평정심(平靜心)과 결합할 때만 미래 세계의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고 보았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5)도 르네상스, 종교개혁, 혁명과 혁명의 사이를 숨 가쁘게 달려왔던 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창세기’의 첫날이 지속하는 미완의 세계라고 보았다. 그에게 본능의 고향이자 내적인 원천을 제공한 러시아에 감사한다는 말까지 남겼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만(1875~1955)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적인 경직상태에 빠진 유럽에 니체의 체험과 러시아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교량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철학과 예술이 추구했던 유럽과 러시아의 상호보완이란 이상은 냉전의 시작과 함께 온 국제관계의 냉엄한 현실주의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더불어 푸틴이 종종 스탈린과 비유되기도 하고 그의 측근과 ‘올리가르히’에 대한 서방 측의 제재가 잇따르면서 반러시아적인 정서는 이제 예술의 세계에까지 번졌다.
오만과 편견, 평화 공존의 길 막아
영국의 카디프 교향악단은 연주 프로그램에서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퇴한 해를 기념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삭제했다. 푸틴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뮌헨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해임됐고,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을 강요받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네트렙코는 모든 공연계획을 취소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파문을 몰고 오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출구가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측은 우크라이나가 요청하는 현대적 공격무기를 제공하고 이에 대처하는 러시아가 더 강력한 무력수단을 투입하는 악순환의 고리는 핵전쟁으로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지구촌의 현안에 대해 진지한 해법을 찾고 견해를 밝혀 온 철학자 놈 촘스키의 최근 제안에 그래서 나는 주목을 돌리게 된다. 그는 허리케인이 오는데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처럼, 푸틴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외교적 협상이 우선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의 기본 틀은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우크라이나 연방 구조 안에서 돈바스 지역에 대한 고도의 자치권 부여이며, 크름반도(크림반도)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제 지구촌이 맞고 있는 대전환기의 한 고리가 되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온 세계질서의 주축인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반아시아적 야만으로 여겨졌던 러시아와 낙후한 아시아의 상징이었던 중국이 하나의 대립 축을 형성, 본격적으로 힘겨루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냉전체제라 불리는 지금의 갈등이 언제, 또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전망은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이의 해결이 핵전쟁으로까지 비화한다면 어느 편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견고한 분단체제 속에 오래 갇혀 있는 한반도가 앞으로 핵 참화의 또 다른 뇌관이 되지 않도록 남북이 함께 모은 지혜와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요구된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해결은 물론, 한반도에서 전쟁의 비극을 다시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우월만을 믿는 오만을 버리고, 상대방을 편견 속에 가두어 놓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다. 오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어렵게 하고, 편견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해서 협상과 화해, 그리고 평화스러운 공존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