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써준 글로 출판해서 이름을 내고, 봉사 기록을 부풀려 실적을 마련하는 젊은이들이 개탄스럽다. 정말 이건 아니지 싶어 고개를 가로젓다가 개탄을 넘어 살짝 불안해진다.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똑똑하다는 요즘 청년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성장한 건 아닐까. 번듯한 집안에서 멀쩡하게 잘 커서 예절도 바르고 대인관계도 좋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어쩔 줄 모르며 판단이 흐려지는 케이 엘리트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그래서 논문이고 상장이고 다 필요 없고 예전처럼 ‘빡세게’ 시험 쳐서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봐야 시험이란 인재를 기르는 게 아니라 거를 수 있을 뿐인데 말이다. 기출문제를 다 풀고, 옆 나라 수험서도 구해서 풀고, 출제자급 과외선생에게 전수받은 비법으로 풀고, 그래도 틀리면 다음해에 다시 응시해서 풀면 될 수 있는 인재란 또 뭐란 말인가. 귀신같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끈기만큼이나 복수심이 강하며, 입학시험 석차가 삶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믿는 구식 엘리트들을 다시 봐야 하는가.
이제 입 달린 자들이 저마다 입시제도나 스펙관리에 대해 한마디씩 한다. 내로남불이니 부모협찬이니 알기 쉬운 신조어를 만들어 비아냥거린다. 나는 기괴한 스펙관리나 불공정한 입시제도도 정나미 떨어지지만, 어쩐지 한국사회 소통의 진정성과 본원성이 쇠락한 현실이 더 염려스럽다. 진심을 숨겨서 모호하게 말하는 데 능하고, 자신의 출신과 성장 배경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젊은이들이 엘리트로 성장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진심을 말하지 않는 자는 일단 의심스럽다. 진정하지 않은 자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결국 저지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의뭉스러운 자들을 경계한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숨겨서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이 위험스럽게 여겨진다. 세상에는 이런 자들이 숨어 있기 마련인데, 실로 언론이란 이런 자들 중에 특별히 간교하고 위협적인 자들을 드러내 폭로하는 기관이다. 언론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거짓 맹세나 가짜 학위는 잠깐만 효력을 누릴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행동인지조차 모른다는 듯 행동하는 젊은이를 놓고 그래도 스펙은 좋다고 평가하는 우리 교육체계에 있다. 자신의 능력, 출신, 성장 배경을 배반하며 성장하는 젊은이를 보면서 스펙위조인지 아닌지, 부모 찬스를 쓰는지 마는지 정파적으로 저울질하는 언론에 있다. 애초에 자기 생각이나 믿음을 진정하게 말하고 싶어도,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의 출처를 모르기에 진정할 수조차 없는 젊은이들을 차세대라고 대접하는 우리 사회가 병들고 있다.
천재라면 어려도 고유한 사상을 만들어 내어 정교하게 가다듬을 수 있다. 보통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의 출신, 경험, 교육에서 유래한 생각이나 믿음을 바탕으로 점차 성숙할 수 있을 뿐이다. 어려서 읽은 만화책, 고등학교 때 울며 익힌 한자와 미적분, 대학교 때 감탄하며 읽던 오역된 책들이 어른인 나를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 오해와 실수, 오만과 긍지, 그리고 열병에 가까운 숭배와 이후에 어김없이 뒤따르는 창피함을 거쳐서 진정한 내가 태어난다. 성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누가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뻐기며, 누가 거짓으로 고백하는지를. 그런 자들을 보면 잠시는 그러려니 하며 봐주지만, 친구로 삼을 수 없고 지도자로 모실 수도 없다.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품지 않는 젊은이는 엘리트는커녕 자율적인 성인조차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입시제도나 스펙관리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한마디를 해도 제 생각을 짜내서 말하고, 한 문장을 써도 어디에서 유래한 말인지 고민해서 쓰는 젊은이가 어쩐지 비정상처럼 보이는 이 시대를 염려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타락한 늙은이조차 나올 수 없는 영원히 어리숙한 미성년자들의 시대로 저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