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진유영은 공연 도중 제사장으로 분해 축문을 낭송하고, 항아리를 망치로 깨부수려 했다. 또 다른 공연에선 팽팽한 붉은 풍선의 표면에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었다. 벨라는 작은 노트를 손에 쥐고 적힌 말들을 노려보며 그로울링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발산하던 그의 몸은 형형하게 빛났다. 위지영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편지봉투에 행운의 편지를 담아 관객 모두에게 건넸다. 봉투엔 이곳으로부터 먼, 지금으로부터 오래전의, 지금은 그의 생사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수신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음악가였지만 그들의 현장에선 음악 바깥으로 뻗쳐나가는 힘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일종의 제의였고, 명료한 언어 체계 밖에서 발성하는 시간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오래된 이야기에 연루시키는 과정이었다. 음악이 어땠냐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다. 많은 음악 공연에서 시도했듯 소리의 구조를 따져보자고 덤벼드는 일도 무의미했다. 이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그 일련의 사건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고 싶었다. 거기엔 음악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질문들이 있었고, 그건 대체로 ‘퍼포먼스’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다이애나 테일러의 <퍼포먼스 퍼포먼스>는 예술의 내부뿐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퍼포먼스를 다루는 책이다. 많은 이론서가 그러하듯 그 또한 퍼포먼스의 정의와 역사, 퍼포먼스하는 몸, 관련 연구를 다루지만, 그에 접근하는 방식은 보편의 이론서와 다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 책은 퍼포먼스에 대한 정의가 왜 불가능에 가깝거나 그에 관한 질문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사례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거나 인과관계로 연결하지 않고 그가 발견한 퍼포먼스의 여러 형태들을 언급한다. 이 책이 펼쳐보는 퍼포먼스들은 일상의 표면에서 마주치지 못하는 사건들을 감각할 수 있는 층위로 꺼내고, 특정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예기치 못한 균열을 만든다. 그 일들은 간단하고 견고하기보다는,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이 책이 퍼포먼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또한 책 속 사례들과 닮았다. 저자와 역자와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쓰며 무엇을 소거하는 대신, 그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엮을 수 없는 것을 엮지 않고, 이곳에서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그 장소의 맥락을 조금씩 덧붙이고, 어떤 말을 반복하거나 힘주어 강조한다. 이 책의 안팎은 마냥 말끔하지 않은데, 그건 꽤 당연해 보인다. 이들이 행하는 일은 하나의 사건으로 쉽게 일축될 수 없는, 퍼포먼스에 층층이 누적된 복수의 몸짓과 사유를 펼쳐서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테일러는 이렇게 쓴다. “퍼포먼스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적 지식, 기억, 정체성을 송신하는 중요한 전달의 기능을 수행한다” “몸은 메시지인 동시에 매체이다. 아즈텍의 사제, 타라후마라의 샤먼, 동시대에 활동하는 퍼포머는 항상 현재, 미래, 과거, 여기와 여기 너머 사이에서 교섭한다” “문제는 모든 것이 행해질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책임을 느끼며, 윤리적으로 행하는가이다”.
이 책은 퍼포먼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해주는 대신, 퍼포먼스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가 퍼포먼스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제안한다. 나는 이 책을 퍼포먼스에 답하는 대신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질문을 만들고 검토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찾는다. 퍼포먼스는 무엇을 하는가? 이 일련의 행위를 만든 욕망은 무엇일까? 이 퍼포먼스에 관여한 우리 모두는 각자 이것을 겪음으로써 무엇을 잃거나 얻거나 배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