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경험'을 쌓다···성소수자 여성들, '체육관 대관 차별' 동대문구에 승소하기까지

강은 기자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서지은, 박한희) / 이준헌 기자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서지은, 박한희) / 이준헌 기자

차별을 차별로 인정받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든다. 서울서부지법 제2-1 민사부(재판장 박성규)는 지난 17일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서울 동대문구청과 동대문구 시설관리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측에 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2년4개월, 체육관 대관 신청이 부당하게 취소된 지 4년8개월 만이었다. 가시적 ‘손해’를 인정하지 않았던 1심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힌 결과였다.

지난 19일 오후, 성소수자 단체 ‘언니네트워크’의 마포구 사무실에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 송정윤(38), 박한희(37), 서지은씨(33)를 만났다. 이들은 “차별을 인정받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면서도 “우리에겐 ‘이기는 경험’이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퀴어여성네트워크 측은 제1회 퀴어여성생활체육대회를 열기 위해 2017년 9월 동대문구체육관 대관 신청을 했다가 일주일 후 돌연 취소 통보를 받았다. 허가를 내줬던 동대문구 시설관리공단 측은 ‘민원이 들어온다’ ‘왜 성소수자 행사라고 말해주지 않았냐’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니 결국 “천장 공사가 예정돼 있다”며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박한희, 서지은) / 이준헌 기자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박한희, 서지은) / 이준헌 기자

당시 대관 업무를 맡았던 정윤씨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했던 마지막 한 마디를 기억한다. “후회하게 되실 거에요.”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인권위가 ‘성적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이라 보고 동대문구시설관리공단 등에 2019년 시정권고를 내렸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성소수자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좋은 선례를 남기려면 법적 소송에서 이겨야 했다. 앞으로도 반복될 차별 행위들에 맞설 무기가 필요했다.

1심에서는 패소했다. ‘우리는 분명히 차별을 당했는데 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까.’ 활동가들의 무력감이 컸다. 그런 만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아이다호, 5월17일)을 앞두고 전해진 항소심 승소는 선물 같은 소식이었다. 지은씨는 “대관 허가 취소는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 행위로 평등의 원칙(헌법 제 11조 제1항)에 반해 위법하다”는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며 눈물을 흘렸다.

한희씨는 동대문구의 대관 차별 경험이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미칠 무력감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성소수자라서 거부당했다’는 말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이런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집회나 시위도 아니잖아요. 그냥 즐겁게 놀려고 체육대회를 하려던 건데 우리가 차별받아서 못 하게 됐다고 알리는 게 너무 속상한 거죠.”

차별의 경험은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전에 스스로 검열을 거치도록 만든다. 이후 다른 체육관 대관 신청서에는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빼고, 행사 홍보를 할 때마다 눈치를 보게 됐다. 정윤씨는 “전처럼 대관이 취소될까봐 자꾸만 ‘플랜B(차선책)’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반대와 차별에 부딪히면서도 어떻게든 행사를 진행하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스포츠 참여 기회에서 배제돼 왔잖아요.” 정윤씨의 말이다. 한희씨도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들은 성별 구분 때문에 샤워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워 헬스장이나 수영장을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면서 뛰고, 부딪히고, 넘어질 수 있는 공간을 원한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박한희, 서지은) / 이준헌 기자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퀴어여성네트워크’ 활동가들 (왼쪽부터 송정윤, 박한희, 서지은) / 이준헌 기자

체육대회는 우여곡절 끝에 ‘퀴어여성게임즈’라는 이름으로 은평구체육관과 강서구 KBS 제2체육관에서 총 두 차례 진행됐다. 올 가을 3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각 회당 선수단 100명, 관람객 200명, 총 300여명이 참여했다. 종목은 배드민턴, 농구, 계주, 풋살.

항소심 승소를 기념해 3회 행사는 동대문구 체육관에서 열 수 있지 않을까. 지은씨가 웃으며 “충분히 그럴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동대문구 체육관이 정말 넓어서 좋거든요. 안 그래도 큰 체육관 시설이 많지 않아서 후보군이 몇 없어요. 모든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사 이름엔 ‘퀴어여성’이란 단어가 있지만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정윤씨가 말했다. “우리들에겐 이기는 경험이 필요해요. 여성과 성소수자들도 있는 힘껏 싸워서 그라운드 위에서 이겨 봐야죠. 성평등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할 테니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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