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와 규제완화 보따리 맞바꿀 텐가

안호기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정부가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풀어서 화답할 때이다. 모든 부처가 규제개혁 부처라는 인식하에 기업활동, 경제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해야 한다. 대통령실도 부처와 잘 협조하고, 또 어렵고 복잡한 규제는 제가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안호기 논설위원

안호기 논설위원

“정부가 기업하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치워주고 부족한 부분을 보태주겠다. 세금 감면과 규제완화 모두 투자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경제 살리기의 주역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고, 기업이 돼야 한다.” 2008년 상공의날 행사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규제완화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 표명이 1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역대 어느 정권도 규제완화를 강조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3년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을 시작으로 본다면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규제완화가 화두인 것은 늘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윤 대통령의 ‘화답’은 최근 주요 대기업이 잇따라 내놓은 대규모 투자계획에 대한 것이다. 삼성그룹은 5년간 450조원을 투자해 8만명을 고용하겠다고 지난달 24일 밝혔다. SK 247조원, LG 106조원, 현대차 63조원 등 11개 대기업집단의 5년간 총 투자규모는 1060조원을 웃돈다. 대통령 임기에 맞춰 투자규모를 정했다. 기업들이 투자한다니까 규제를 풀어주겠다니 마치 투자와 규제 보따리를 맞바꾸려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을 들어봤다. “갑자기 5년 투자계획을 만드느라 힘들었겠다.” “기업은 늘 장단기 투자계획을 갖고 있다. 5년에 맞춰 숫자를 조금 손질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투자계획 발표는 정부에서 요청한 것이었나?” “알아서 판단하라.” “새 정부의 규제완화 의지가 강한 것 같은데.” “알 수 없다. 정권 초마다 항상 이런 이벤트가 있었던 것 아닌가.”

삼성그룹은 2년 전에도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열흘 만이었다. 3년간 240조원 투자, 4만명 고용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5년간 450조원, 8만명 신규채용으로 바뀌었다. 연간 규모로 따지면 액수는 10조원, 고용은 2700명 늘었다. 기업 성장에 따라 투자와 고용을 늘리는 추세를 감안하면 그 규모는 평시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눈치를 봐서 투자계획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과거처럼 대통령실 또는 경제부처 관료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간다. 윤석열 정부는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한다’는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기업이 차린 투자 밥상에 정부가 숟가락 얹는 식이다.

“화답할 때”라고 했으니 이제는 정부의 시간이다. 각 부처는 없애야 할 규제를 찾아내 리스트를 만드는 책상머리 규제완화에 착수할 것이다. 규제완화 역사가 30년이니 전임자들이 물려줘 책상서랍 깊숙이 넣어뒀던 규제 목록을 꺼낼 법도 하다. 몇 건의 규제를 없애 진도율 몇 %라는 식의 경쟁적인 성과보고도 예상된다.

법과 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쳐도 현장에서 운용하는 담당자가 틀어쥐고 있으면 규제완화 효과는 없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SK하이닉스가 120조원을 투자해 약 448만㎡(약 135만평) 부지에 반도체 제조공장(FAB) 4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용인은 공장 입지와 면적 제한을 받는 수도권에 위치해 규제를 풀어야 했다. 심의를 통과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 첫 삽을 뜨지 못했다. 토지보상이 원활치 못한 영향이 크지만 각종 영향평가와 유관단체와의 협의 등에 가로막힌 탓도 있다. “정책 규제보다 심각한 것은 미시적 규제”라는 기업 관계자의 말을 실감케 한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건 당연하지만, 규제 푼다고 경제가 살아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처가 규제개혁 부처’를 강조한 윤 대통령 당부가 무차별적 규제완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크고 작은 기업 규제가 약 3000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기업의 부담을 더는 규제완화는 정부 개입 최소화를 뜻한다. 이는 ‘작은 정부’ 지향과 맞물려 감세와 복지 축소가 불가피하다. 특정 집단의 독단을 막고, 안전을 지키는 좋은 규제마저 없앨 수 있다. 규제완화는 투자한다는 기업에 던져주는 선물이 아니다. 부정적 효과까지 살펴 신중하고 질서 있게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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