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와 칼국수는 별식으로 즐기는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이다. 하지만, 1960~70년대에는 어쩔 수 없이 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정부가 혼·분식 장려 행정명령으로 밀가루 음식을 강제했기 때문이다. 1969년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날’, 이른바 무미일(無米日)로 정했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에 일정 비율 이상의 보리나 밀가루를 혼합하고, 오전 11시~오후 5시에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쌀을 원료로 한 떡, 과자, 엿 등을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하는 규정도 생겼다.
1970년 쌀 소비량은 1인당 136.4㎏으로 지난해(56.9㎏)의 두 배가 넘었다. 쌀이 부족해 해마다 50만t 안팎의 쌀을 수입했다. 경향신문은 1973년 3월15일자 사설에서 “양곡의 자급자족이나 외화의 절약뿐만 아니라 영양을 높이거나 건강을 유지하는 견지에서 쌀보다 혼·분식이 더 유리하다”고 썼다. 한국전쟁 후 구호물자로 지급됐던 밀가루는 서민들에게는 쌀을 대체하는 주된 음식 재료였다. 장년층 중에는 그 시절 지겹게 먹었다며 수제비를 멀리하는 이들도 있다.
밀가루가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글로벌 통계 사이트 ‘index mundi’ 자료를 보면 밀(미국산) 국제가격이 쌀(태국산)을 추월했다. 밀의 t당 평균가격은 지난 4월 495달러로 쌀(431달러)보다 높아 3월에 이어 역전현상이 이어졌다. 쌀 가격은 보통 밀보다 1.5~2배 비싸게 거래된다. 최근 30년간 밀이 쌀보다 비싸진 적은 2002년 가을과 2007년 가을·겨울 두 차례뿐이었다. 전에는 쌀이 밀보다 가격이 낮아져도 98% 안팎으로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87%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시중에서 아직 1㎏ 소매가격은 밀가루 1610원, 쌀 2454원으로 쌀이 강세다. 하지만 국제가격이 가파르게 치솟고 있어 국내 밀가루값이 언제 쌀을 앞지를지 모른다. 농림축산식품부가 2027년까지 가공 전용 쌀인 분질미(粉質米·밀처럼 건식제분이 가능해 쌀가루로 가공하기에 용이한 쌀) 20만t을 공급해 연간 밀가루 수요의 10%를 대체하겠다고 한다. 이러다간 쌀가루 사용을 의무화할 판이다. 세상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