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덕순 언니의 밥상](https://img.khan.co.kr/news/2022/07/08/l_2022070801000594300053241.jpg)
봄이 오는 소리에 놀라
씨감자가 뿔이 났어요
밭에다 심었더니
새삭이 잘 자랏다
연보라색 꽃이
예쁘게 되었다
다 자랏다는 신호인 것 같다
토실토실한 감자가 얼마나 열였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믓하다
-시, ‘봄이 오는 소리’, 신위선, 공동시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김해자 시인
고개를 젖히더니 옆으로 누워버린 누런 잎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망설이다 폭우가 내린다기에 감자를 캐기로 했다. 줄기를 살살 흔들면서 잡아끌었더니 뿌리가 뽑혀 올라오는데 놀랐다. 제법 큰, 그러니까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달려 나왔으니까. 쭈글쭈글한 감자알을 쪼개 묻어 두었을 뿐인데, 그 시꺼먼 땅속에서 맑고 둥글둥글한 것들이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니. 기대하지 않아서 더 신기했을 것이다. 새로 얻은 도지에 흙을 퍼붓고 돌을 고르고 이랑을 만들다보니 이웃들보다 한 달여 늦게 심은 데다, 5월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큰놈은 몇 안 되고 덜 자란 감자가 태반이었다. 나야 늦게 심어 그렇다 치고, 농사를 잘 짓는 승분 언니 감자도 올해는 알들이 작았다. “날씨가 이러면 정말 농사 못 짓겄어” 하면서도 큰 감자와 조림용으로 먹는 작은 감자 두 박스나 안겨주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포슬포슬한 감자 속살엔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나 보다. 점심으로 며칠째 쪄먹는데도 다시 찾게 된다. 담백한 맛은 오래 간다. 매일 먹는 물이나 밥처럼 질리지 않으니까. 감자에 십자무늬를 넣어 구워서 먹으면 껍질까지 잘 넘어간다. 가끔은 덕순 언니가 알려준 대로 감자를 갈아서 즙은 마시고 건더기는 부쳐서 양념장에 발라 먹는다. 처음 들었을 땐 ‘어떻게 감자 생즙을 마시지?’ 싶었는데, 생각만큼 아리지 않았고 사르르 녹는 부침개는 모든 세포들이 연대해서 행복의 깃발을 드는 것 같았다. 덕순 언니는 이틀 간격으로 같은 부위를 수술한 사이이자, ‘암스트롱 동지회’의 맏언니다.
암스트롱은 기왕 암이 찾아왔으니 잘 보살피면서 강해지자는 다짐이었다. 수술 후 깨어나자마자 혈압이 치솟고 혀가 바짝바짝 타들어가 물수건 물고 누워 있는 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덕순 언니는 림프절과 겨드랑이 임파선까지 절개한 탓에, 늘 팔을 위로 뻗은 채 자고 만세 자세로 걸어다녔다. 피가 급속히 줄어든 탓에 ‘큰일 치를 뻔’도 했다.
일명 ‘감자요법’은 물 들어가도 아플 만큼 오장육부가 망가진다는 항암치료를 8번씩 하면서 덕순 언니가 터득한 식이요법 중 하나다. 어쩌면 하얀 전분이 가라앉아 있는 감자즙은 암을 죽이느라 화학약품을 투척한 상처 난 위벽을 도포하여 진정시키는지도 모른다. 낡고 부서진 데를 고루 펴바르는 미장이처럼. 퇴원 후 덕순 언니가 사진 찍어 보낸 밥상을 보면 단순하고 소박하다. 살짝 데친 브로콜리와 붉고 노란 파프리카에 올리브유를 부은 샐러드와 마늘장아찌와 구운 보라색 가지가 기다랗게 누워 양념장을 덮고 있는 밥상. 큰 덩치에 걸맞게 식재료를 박스로 사곤 하는 언니 밥상을 보면, 가지와 감자를 둘러메고 걸어가는 시장통이 보이고, 정성스레 감자를 갈고, 남은 건더기에 고추나 부추나 깻잎 몇 조각 넣어 기도하듯 부침개를 만드는 기도소리가 들린다. 녹즙기가 망가져 세 개째 쓰고 있다는 2년 동안의 간절한 투병의 길이 보인다. 어쩌면 투병이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지도 모른다. 건강한 세포도 병든 세포도 한 몸에 존재하고 모두 내가 만든 것인데 대체 누가 누구랑 싸운단 말인가.
어쨌든, 6개월도 장담 못한다던 난치성 암판정을 받았던 덕순 언니는 그때로부터 2년 반을 잘 살고 있다. 투병을 ‘잘 사는 삶’으로 바꾸고, 수술한 병원에서 암환자 식이요법 강의까지 하면서. 웬만한 장정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건축 현장에서 노가다를 30년 이상 해온 덕순 언니가 생각나는 밤, 쪼개져 재를 덮어쓴 감자 조각 하나가 땅속에서 뻗어나간 길이 보인다. 뿔처럼 돋은 눈을 더듬거리며 뿌리를 만들어가는 작은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꼭지 하나로 바깥세상에 줄기를 뻗고 잎을 달며 담담하게 꽃을 피우며, 어둠 속에서 골똘히, 둥글게 둥글게 영글어가는 가난하고 맑은 영혼들이 보인다. 할머니라 불리고서야 한글을 배운 신위선 어매처럼, 씨앗을 묻고 토실토실 익어가는 감자를 상상하며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믓하다”는 통 큰 대지의 마음이 우리를 먹여살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