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근거 없이 보장 범위 축소…보험금 지급 거부·해지도
소비자보호법 등 위배…가입 차별, 치료 기피로 이어질 우려
30대 여성 A씨는 불면증 진단을 받고 올해 상반기 약 3개월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그는 치료가 끝난 후 실손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보험설계사와 상담을 했다. 설계사는 ‘F코드’(정신질환을 일컫는 상병코드) 진단을 받은 이력을 문제삼으며 “보험 가입이 어렵다”고 했다. 보험사에서 이뤄지는 별도의 가입 심사 절차는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다.
지난해 적응장애를 진단받은 B씨는 최근 보험사에 실손보험과 암보험 가입을 문의했다. 보험사는 “우울증은 (승인) 검토가 어렵다”고 했다. 진료 기록지를 내면 추가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암치료나 질병 수술비는 보장 범위에서 삭제된다”고 알려왔다. B씨는 “보험사가 합리적인 근거 없이 거절 딱지만 붙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2004년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C씨는 4년 뒤 보험사에 종신보험 가입을 문의했다가 거절당했다.
보험사가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이들의 보험 가입 신청을 거부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현행법상 정당한 사유 없이 정신질환자의 보험 가입을 제한해서는 안 되지만, 보험업계는 일단 ‘가입 거부’부터 하고 보는 관행을 바꾸지 않고 있다. 업계는 정신질환과 보험사고율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험사의 정신질환자 가입 거부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향신문이 17일 국가인권위원회와 관련 학회에 접수된 진정과 민원 등을 분석해보니, 보험사는 정신질환 이력이 있으면 경증·중증에 관계없이 가입 신청을 거부하거나 보장 범위를 대폭 줄이는 등 차별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전에 정신과 진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보험 해지를 통보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보험사는 질환별로 가입 승인 기준이 있다고 밝혔지만 그 기준에 대해서는 ‘영업 비밀’이란 이유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보험사의 행태는 금융소비자보호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위배된다. 지난해 9월부터 시행된 금융소비자보호법 제15조는 ‘금융상품판매업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성별·학력·장애·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계약조건에 관해 금융소비자를 부당하게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2018년 4월 경증 정신질환에 대해 실손보험 보장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 보험 가입 시 장애 여부를 사전에 고지해야 하는 의무를 폐지했다. 다만 가입 신청 시점 기준 5년 이내에 7일 이상 치료 또는 30일 이상 약 처방 등 이력이 있는 경우는 미리 알리도록 하고 있다.
인권위가 2012년 발표한 ‘장애인 보험 차별 개선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는 보험 가입을 거절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로 의학적·과학적 근거, 검증된 통계 자료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 측은 ‘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근거 자료가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없는 것으로 안다”고 답변했다. 보험사의 ‘가입 차별’은 정신질환을 치료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치료 기피’로도 이어진다.
금감원 관계자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보험 가입을 차별하지 않도록 기준을 정비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최근 보험사에 보냈다”며 “구체적인 부분은 보험사가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라 (당국은) 큰 방향을 설정해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