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의 꽁지머리에 검은색 선글라스,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칼 라거펠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마치 피아노 건반의 흑백 대비를 보는 것 같다. ‘패션계의 교황’ ‘패션계의 카멜레온’ 등 수많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닌다. 고전적 형태를 현대적 디자인 모티브로 재해석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던 창조적 디자이너 라거펠트. ‘책은 과하게 복용해도 부작용이 전혀 없는 마약과도 같다’던 그는 독서광이자 장서가이기도 했다.
패션 잡지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가장 좋아하는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는 흰색의 난초와 흰색의 수국을 꼽았다. 난초는 사군자 중의 하나이다. 꽃 모양이 고아하고 줄기와 잎이 청초하며 향기 또한 그윽하여 범상치 않은 자태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라거펠트가 좋아했던 난초는 사군자 그림에서 자주 보던 동양란이 아니라 나비처럼 꽃잎이 크고 화려한 서양란이다. 요즘 원예용으로 재배하여 거래되는 서양란은 남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고 주로 유럽에서 개량되어 붙여진 이름인데 대표적인 것이 호접란이다. 그가 좋아한 수국 역시 원산지가 아시아와 미국이며 원예종으로 개발된 것들이 무척 많다. 우리가 흔히 보는 수국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씨를 맺지 못해 가짜꽃, 또는 장식화라고도 한다. 라거펠트가 좋아했던 흰색의 수국은 미국 수국 ‘애너벨’이 아닐까 생각된다. 라거펠트는 드레스나 티셔츠, 핸드백 등에 서양란과 수국 문양을 프린트한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흰색의 서양란을 코르사주처럼 장식하거나 수국 모양의 꽃장식 패치를 일일이 덧대어 입체적인 드레스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서양란이 상징하는 바는 다양하다. 붉은색 난은 용기, 열정을 상징하지만, 흰색 난은 순결, 우아 등을 상징하여 결혼식이나 종교 행사에 자주 등장하는 꽃으로 신성함을 북돋운다. 흰색의 수국은 허영심, 품위를 상징한다. 그가 입던 속옷은 HOM의 남성용 블랙 팬티였지만, 꽃은 서양란이나 수국 모두 흰색을 좋아하였다. 결국 꽃의 생김새도 중요하지만, 색상이 상수(常數)였음을 알 수 있다. 순결하면서도 오만하고, 겸손하면서도 품위 있는 흰색의 난초와 수국을 사랑했던 라거펠트의 삶 속에는 진정한 화려함이 숨어 있다.
그가 독서광이었던 터라 <사자소학>의 용모단정과 의관정제라는 뜻을 알았던 걸까? ‘조깅 팬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다’라고 했던 그는 화려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선비’ 디자이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