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그룹, 상생·ESG 말하지 말라

파리바게뜨에 발길을 끊었다. 한 3개월쯤 된다.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파스쿠찌, 빚은 등 같은 SPC그룹 브랜드 지점도 되도록 안 갔다. 도심 번화가라면 5분마다 하나씩 만나는, 그물망처럼 촘촘한 ‘파바’와 SPC그룹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 바로 코앞에도 ‘파바’가 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 임종린의 단식 그 후의 일이다.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논설위원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논설위원

파리바게뜨에서 15년째 제빵기사로 일하는 임종린 지회장은 지난 3월28일부터 5월19일까지 53일 동안 단식을 감행했다.

“점심시간 1시간은 당연히 밥 먹고 쉴 수 있어야 하고, 아프면 당연히 쉬고, 가족이 상을 당하면 당연히 가볼 수 있어야 하고, 일을 했으면 당연히 그만큼 급여를 받고, 임신했으면 당연히 모성보호를 받고, 당연히 연차·보건 휴가를 쓰고, 열심히 일하면 당연히 공정하게 진급하고, 다치면 당연히 산재 처리를 하고, 약속하면 당연히 지키고.”

요구 사항들은 목숨 건 단식의 무게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상식적인 것들이다.

이른바 ‘파바사태’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가 제빵기사 5300여명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했고, 임금체불액도 100억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적발해 시정 명령했다. 우여곡절 끝 2018년 1월 SPC와 민주노총·한국노총 노조, 시민사회단체와 정당(더불어민주당·정의당), 가맹점주협의회 등 7자가 참여한 11개항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노동자들이 직접고용 대신 자회사를 통한 고용 방식으로 양보했으니, 사측은 3년 안에 본사 정규직과 동일 수준의 급여로 맞추고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합의는 이행되지 않고 있다. SPC그룹이 지난해 4월1일 일방적으로 사회적 합의 이행 완료를 선언했을 뿐이다. 학계, 시민사회 인사 등이 모인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이행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11개항 중 이행한 것은 2개뿐이고, 5가지 핵심 항목(부당노동행위 시정, 근로계약 체결, 처우개선을 위한 노사간담회 및 협의체 운영 등)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검증위의 결론이다. 노조의 양보로 거액의 과태료(162억7000만원)와 처벌을 면한 사측이 최소한의 책임마저 회피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더해 ‘사회적 합의 이행 완료’ 셀프 선언으로 ‘불법’ 꼬리표를 떼낸 사측은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노조 탄압에 나섰다. ‘민주노총 조합원 0%’를 목표로 3000개가 넘는 가맹점에 섬처럼 흩어져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각개격파를 시도했다는 것이 퇴직 관리자의 제보로 알려지기도 했다. 민주노총 노조 탈퇴엔 포상금 지급이, 불복하면 승진 누락 압박이 이어졌다. 사측 관리자 9명은 부당노동행위 혐의가 확인돼 검찰에 송치돼 조사 중이다.

노동조합이 뭔지, 노동자의 권리가 뭔지도 모른 채 파리바게뜨 협력회사에 입사해 시키는 대로 일만 해 왔던 ‘모범사원’ 임종린과 그의 친구들이 인간답게 일하게 해 달라고 외치고 있다. 여성, 청년, 비정규 노동자…. 약하고 평범한 이들의 투쟁은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이들의 미래는 우리들의, 자녀들의 미래다. ‘눈물로 만든 빵에 반대한다’는 구호와 자발적인 불매운동이 조용히, 그러나 맹렬히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파바’가 단기간에 제빵업계의 강자로 우뚝 선 배경엔 식사도,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하루 9시간 넘게 기계처럼 일하면서도 불법파견으로 제 몫도 못 챙긴 제빵기사들의 고강도 노동이 있다. 이제까진 이런 방식이 통했을지 몰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자들은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 실천에 주목한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역설한 것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다. 그는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사회에 기여하는 프랜차이즈 ESG 경영을 적극 추진하겠다”며 ESG 전담 조직까지 신설했다. 홈페이지의 CEO 인사말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사회적 책임은커녕 내부 노동자들의 비판, 소비자들의 외면에 직면한 역설적인 상황에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시급한 것은 지난 4일부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민주노총 파리바게뜨지회 간부 4명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18일을 굶고 있는 노동자들의 상처도 닦아주지 못한다면 SPC그룹은 ‘ESG 경영’을 말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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