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집’ 정유미 감독 “내게 작업은 균형을 잡는 방법”
‘각질’ 문수진 감독 “작업을 하면서 내게 솔직해져”

정유미 감독의 <존재의 집>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존재의 집>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8분30초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 <존재의 집>(감독 정유미)은 예쁜 벽돌집이 앞에서부터 차례로 부서져 가라앉으며 시작한다. 집이 거의 다 사라져갈 때쯤 한 사람이 나타난다. 벌거벗은 채 욕조에 있던 그는 뚜벅뚜벅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간다.
6분45초 분량의 <각질>(감독 문수진)에는 홀로 집에 있는 평범한 얼굴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화려한 이목구비와 밝은 표정을 가진 가죽을 입고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날은 습하고 가죽은 답답하지만 친구들과 이야기 하려면 가죽이 필수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가죽을 벗지만 숨을 쉬기 어렵다. 원래 얼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가죽이 걸어 나와 쪼그라든 원래의 주인공을 들고 나간다.
지난 17일 막을 내린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단편’ 부문에서 상영된 영화들이다. <존재의 집>은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각질>은 지난 5월 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이미 초청받았다. 내면의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낸 한국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품이 세계적 공감을 얻었다.
지난 13일 화상으로 만난 정 감독은 “집은 사람들이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외부로부터 인정받게 하는 물질화된 가치들”이라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돈, 명예 등 가치들이 의도와 다르게 무너지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다. 정 감독은 “역설적이게도 외적인 상황들이 생겼을 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영화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 비로소 존재가 보이는 것도 그런 상황을 빗댄 것”이라며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 돌아보면 나를 성장하게 하거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도 한다. 당장엔 부정적일 수 있지만 긴 삶에서 봤을 때는 오히려 좋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수진 감독 <각질>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각질>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각질>은 타인에게 비난받지 않기 위해 만들어 낸 페르소나를 각질과 가죽에 비유한다. 이 작품은 문 감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이다. 세계 최대 규모인 국제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 학생 경쟁 부문에서 대상인 크리스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각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신을 만들어 내고, 그 모습을 실제 자신과 구별하지 못하는 문 감독 스스로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에서 만난 그는 “제 주변 친구들이 모두 가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걸 잘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죽에 집착해 매몰되고 자아를 외면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 당시 저를 드러내는 게 무서웠어요. 솔직하게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는 눈빛을 경험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더욱 고착화했습니다. 가면 없이는 이 사회의 일원이 절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영화를 위해 두 감독은 수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밀도 있는 작업을 했다. 연필로 직접 세밀화를 그리는 정 감독의 작화는 특히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정 감독은 “<존재의 집>의 경우 그림을 움직이는 ‘동화’와 애니메이팅 작업을 다른 친구와 같이해서 시간이 덜 들었다. 원래는 수작업만 1년이 넘는 경우가 많고, 수정하고 완성하는 데까지는 2년 정도가 걸리는 편”이라며 “연필을 쓰는 게 손이 많이 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익숙하고 편한 도구라 계속 쓴다. 연필이 주는 효과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각질>이 탄생하기까지도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문 감독은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고 편집하는 시간만 2년 정도였다.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만 1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며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더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했다.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을 앞둔 문 감독은 애니메이션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 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마지막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은 혼자 시도하기도 어렵고 돈도 많이 필요하다. 제작 지원 사업이 있긴 하지만 사회 초년생의 마음으로는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어? 안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좋은 작품은 많지만 영화제, 개인 전시 등을 제외하면 관객과의 접점이 많지 않다. 상업영화나 웹툰에 비해 시장도 현저히 작다. 정 감독은 “미래를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으려나 고민을 안고 있었다”며 “각종 제작지원이 도움 되지만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돈을 벌다가 중간에 기회가 닿으면 작업을 한다든지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문 감독은 “3년동안 한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건 여러 지원 덕분이다. 부모님 집에 살면서 밥을 먹고 하니까 딱히 돈 들 일이 없었다. 학생이 아니거나 부모님 도움이 없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며 “앞으로는 생활비를 조금은 벌도록 경제적 측면을 안정시키고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두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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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 해결하기 어려운 고민들을 안고 살잖아요. 각자 균형을 잡고 사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그게 작업인 것 같아요. 작업을 하면서 나름의 방법을 찾기도 하고 문제를 풀기도 하는 거죠. 잘 기록해두면 같은 시대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공유하게 되기도 하고요. 표현하고 느끼고, 나름의 답을 찾고, 기록하고, 관객들과 공감하고…그런 작업을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요.”(정유미 감독)
“<각질>이 정말 저한테 소중한 작품이거든요. 저한테 솔직할 수 있게 됐고, 저를 인정하게 됐어요. 계속 외면해왔지만 저를 몇 년 동안 힘들게 하던 감정이 있었거든요. 근데 작업을 하면서 조금씩 사라지더니, <각질>과 함께 제 몸에서 배출된 거예요. 큰 감사를 느끼고 있어요. 심지어 이렇게 큰 영화제에도 초청받고, 저라는 사람을 알렸잖아요. 정말 ‘효녀’죠. 저라는 사람을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주고, 계속 작업을 해나갈 기회도 만들어줬으니까요.”(문수진 감독)

정유미 감독. 본인 제공.

지난 5월26일 프랑스 칸에서 만난 문수진 감독. 오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