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공영방송 희비극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우리 공화국에서 지겹도록 실패를 거듭하는 제도가 여럿인데, 그중 으뜸이 공영방송이다. 뭐든 새로운 걸 좋아라 하는 우리에게 지겨움이란 악덕이다. 수틀리면 갈아치우면 된다는 식이니 바람직한 제도라고 해도 세심하게 살펴 고쳐 쓰는 데 취약하다. 우리 공영방송은 수틀리면 갈아치운다는 바로 그 논리를 따라 이리저리 차이다 이젠 기괴한 희비극의 클라이맥스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어떤 대사를 쳐야 할지도 모르는 표정인 채로 말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 희비극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상서롭지 못한 전조는 공영방송 경영실패를 이유로 대통령이 사장을 해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일 때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감사원은 특별감사를 실시해서 KBS 사장이 경영책임자로서 비위가 있다며 이사회에 해임권고안을 전달했고, 여야추종 구성비율이 바뀐 KBS 이사회는 경찰의 호위를 받아 사장 해임건의안을 의결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영의 실패를 이유로 들어 기어코 공영방송 사장을 해임했던 것이다.

사법부는 이후 해임처분의 주요 이유였던 최고경영자의 배임죄에 대해 최종 무죄를 확정했다. 해임처분도 무효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도로서 공영방송은 망신창이가 됐는데, 그 난리를 겪고도 배운 게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공영방송 경영의 성패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마땅한지, 여야 추천에 따라 이사진을 구성해서 정권변화에 따라 사장해임을 농단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온당한지, 사장이 바뀌면 뉴스 논조도 바뀌는 공영방송 보도를 어찌해야 좋을지 대책이 없었다.

대책 없이 진행하는 비극은 희극이 된다. 세월호 보도참사를 들어 길환영 사장에 대한 해임제청을 의결했던 KBS 이사회가 정상으로 보였고, 결국 해임을 단행한 박근혜 정부가 잠시나마 온당해 보였던 게 착시가 아니길. 반복한 부실 보도는 공영방송 실패의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며, 사장은 뉴스에 대해 부당하게 간섭해서는 안 되지만, 최고경영자로서 부실한 보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논지가 흐트러지지 않기를. 해임당한 공영방송 사장이 정치적 핍박을 받아 해임무효 소송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영방송 수신료 납부자들은 상식에 근거해서 바랐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 선 이후, 이사회 여야 구성비가 바뀐 KBS 이사회가 당시 고대영 사장이 보도 공정성을 훼손하고 구성원의 의견수렴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이미 부실한 지배구조에 무책임한 설명책임 수행규범을 전통으로 삼은 우리나라 공영방송 제도에 두 가지 어려움을 더했다.

공영방송 뉴스가 공정성을 훼손했음을 결정하는 기준과 절차를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공영방송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게 그 첫번째다. 둘째는 결과론에 따른 것이지만 불길한 전조를 무자비하게 실현하는 징후라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민주공화국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을 바꾸고, 그에 따라 보도 공정성과 내부 구성원 의견수렴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사장 이하 전 간부를 갈아치우는 일이 전통이 되어버린 우리 공영방송을 어찌하느냐는 것이다.

뭐든 수틀리면 바꾸면 그만이고 그것으로 충분한 민주정이라면 나는 여기에서 글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바로 그렇게 부수고 바꾸면 그만이라는 청산주의적 태도가 실로 공영방송과 같은 복잡한 설명책임 구조를 갖춘 공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정권에 따라 공정성 평가기준을 고무줄 잣대로 들이대어 공영방송의 성패를 재단함으로써 정치적 후견주의를 실현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게 곧 실패 그 자체다. 끝나지도 않는 이 희비극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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