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3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리셉션에 시진핑 당시 부주석이 양제츠 외교부장 등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참석 인사의 급과 규모를 보면 이례적이었고,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한·중관계를 중시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오는 24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지만 10년 전과 같은 축제 분위기는커녕 양국 관계가 더 크게 흔들리지 않을지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느낌만 받는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규정된 양국 관계는 경제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뤄냈지만 안보 문제를 두고는 적잖이 삐거덕거렸다. 관계의 고비는 규범과 가치관 충돌 때문이기도 했지만 깊숙한 갈등은 2016년 사드 한국 배치 사태에서 보듯 미국, 북한과 관련된 이슈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격화되는 미·중 갈등, 그중에서도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칩(Chip)4’가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의 핵심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로 옮겨왔다.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을 묶어 칩4를 구성하려는 목적은 안정적 공급망 확보와 중국 반도체산업 주저앉히기 두 가지로 보인다. 반도체 생산시설이 한·일·대만, 중국에 집중된 현실에 미국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코로나19에 따른 이동제한과 반도체 생산 차질로 자동차산업에 직격탄을 맞은 터다. 미국은 이달 안으로 한국 정부에 칩4 가입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칩4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감안해야 할 변수들이 있다.
한국의 칩4 참여는 국내 기업들로 하여금 중국의 보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사드 배치로 롯데가 수조원 규모의 피해를 입고 중국 사업을 사실상 접은 것은 국내 기업들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홍콩까지 합치면 60% 수준이다. 무역흑자의 대부분은 대중 무역에서 나오고, 반도체는 흑자의 일등 공신이다. 리튬, 마그네슘 같은 중간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 중국이 보복에 나선다면 반도체뿐 아니라 화학, 2차전지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타격을 받는다.
물론 중국의 보복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중국은 원유보다 반도체를 많이 수입하며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최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공급이 없으면 중국의 첨단 산업이 멈춰 선다. 경제가 잘 굴러가지 않아 공산당 체제를 흔드는 상황은 중국에 최악이다. 전력 질주하는 마라톤에 비유되는 반도체산업에는 복잡한 소재와 장비, 수만명의 연구인력이 투입된다. 한·중 양국은 반도체산업에서 경쟁하면서 파트너로서 관계를 이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이 한국 외교의 근간이고 미국이 반도체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칩4 가입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되진 못한다. 오히려 삼성, SK, 현대차, LG 등 국내 기업들이 줄줄이 대규모 미국 투자를 밝힌 만큼, 중국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칩4라는 폐쇄적 방법을 통해서만 한·미 간 반도체 협력이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미·중이 경제 측면에서 맺고 있는 관계는 부부와 다를 바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양국은 경제적으로 얽혀 있다. 중국은 미국 국채를 1조달러가량 들고 있는 최대 채권국이다. 오래된 얘기지만 2009년 2월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중국에 미국 채권 투자를 권고하며 “우리는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갈등 속에 숨어 있는 협력적·보완적 관계를 감안한다면 언제까지 두 강국이 다툼만 벌일 수는 없다.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을 지적할 때 ‘샤워실의 바보’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샤워실에서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확 돌렸다 너무 뜨거우면 깜짝 놀라 찬물 쪽으로 돌리고, 다시 찬물이 세지면 온수로 돌리는 것처럼 어떤 정책이 중심과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널뛰기를 반복할 때 쓰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문재인 정부가 친중 정책을 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국민, 특히 청년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취임 후에는 나토 정상회의 참석 등을 통해 미국 중시 색깔을 드러냈다. 나름 미·중 균형외교를 추구했던 이전 정부와 달리 중국을 경시한다면 한국 외교는 샤워실의 바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진보·보수 정권을 오가며 벌인 냉·온탕 대중 외교는 이제 접어야 한다. K반도체는 미·중 양쪽으로부터 압박도 받지만 구애도 받는다. 국익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며 서둘러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