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적당히 칠 줄 알았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들었던 때,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나의 귀였다. 그건 대체로 학교에서 매주 한 시간씩 했던 시창 청음 수업 때문이었다. 오선보에 적힌 선율을 보고 노래하거나, 들려오는 음을 파악한 후 오선보로 옮겨 적는 것이 수업의 주 목적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악보 위의 기호와 내 머릿속에 있는 그 소리를 하나하나 꿰맞춰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창 청음 수업은 기다려지는 수업 중 하나였다. 의외의 선율을 듣고 노래하는 재미도 있었고, 훈련을 통해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걸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주로 피아노와 함께했지만, 간혹 우리는 악기로 연주하지 않은 다른 소리도 음의 개념으로 들어보려 했다. 칠판을 긁는 소리를 내거나, 목소리로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내며 음높이를 알아맞혀 보라고 하는 식이었다. 세상엔 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소리가 훨씬 더 많았지만, 이제 막 머릿속에 하나하나 입력되고 있던 음이라는 개념들을 세계에 적용해보는 과정은 꽤 즐거웠다. 다만, 모든 음악이 ‘도레미파솔라시도’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동에 가까울 정도로 낮고 묵직한 저음으로 이루어진 음악도, 음고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풍성한 파열음으로 가득한 음악도, 소리보다는 연주가의 몸짓과 운동성이 훨씬 더 중요한 음악도 있었다. 현대의 음악을 더 많이 접하면서, 음고로 음악을 이해하는 일이 수많은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그 체화된 청감각을 좀 덜어내보려 애썼다.
오래전에 받았던 이 수업을 다시 떠올린 것은 한 전시장에서였다. 송은 미술관에서 열린 김영은 작가의 개인전 ‘소리의 틀’에는 ‘청음훈련’이라는 제목의 작업이 있다. 2차대전 중 일본에서 실행된 청음훈련을 재연하는 이 작업은 전쟁 상대국의 비행기 소리 모음, 해군에서 분석한 함선 수중음 등이 들려오고, 작가는 청음훈련에 임하는 일인칭 화자의 경험을 작업으로 재구성한다. 생존과 직결되는 소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성질은 다르지만, 나름의 청음 훈련을 받았던 나 또한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이 또한 새로운 체계에 적응하는 훈련이고, 몸의 감각을 그에 동기화하는 것이었다.
전시는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이며 감각이 변화하던 시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여정을 재현한 영상작업 ‘밝은 소리 A’가 있었다. 이 작업은 피아노가 한국에 도착했던 첫 순간이자 서양식 음계가 한국인의 귀에 자리 잡은 중대한 시발점을 다룬다. 음악학자 민경찬은 “피아노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전통음악 음률체계에서 서양음악 음률체계로 그 음 감각이 바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오선보 이야기’는 오늘날의 음악가들에게 한국 음악을 서양식 오선보로 옮겼던 최초의 악보를 둘러싼 쟁점을 자세히 듣는다. 작업들은 각자의 주제를 다루며 지금 ‘소리의 틀’로 자리 잡은 것이 어떻게 도입되었는지를 차분히 이야기했다.
청감각을 바꾸어놓은 이 수용의 역사는 오늘의 감각이 어떤 충돌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조용히 증명한다. 다른 체계를 받아들이며 새롭게 생겨난 것도 있지만 빠져나간 것도 있을 것이다. 전시가 다룬 것, 그리고 내 경험은 ‘음’을 다루는 영역에 머물러있지만 그와 연결될 또 다른 개념들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전통음악을 다뤄온 한 음악가는 자신이 해왔던 일이 ‘음악’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전자음악가는 주파수와 파동의 문제를 다루며 ‘소리’라는 개념 또한 설정된 것이라 언급한다. ‘소리의 틀’에 이어, 어쩌면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소리’라는 틀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그 내부에서는 쉽게 감지할 수 없었던 세계관을 이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