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들이 전하는 당최 모를 이상한 국회와 정치권 이야기입니다.”
더불어민주당 8·28 전당대회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당헌 80조는 부정부패 관련 범죄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하는 내용이다. 여야 모두 부정부패 엄단을 위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각 정당이 놓인 유불리 상황에 따라 늘 개정을 시도해왔다. 선거를 앞둘 때는 혁신과 자정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수단이었다. 야당이 됐을 땐 정치탄압을 강조하며 내 식구 감싸기용으로 느슨하게 바꿨다. 말로만 혁신과 자정을 외치는 정치권 전체에 대한 자성을 요구하는 지적이 나온다.
원조는 문재인·박근혜···혁신 일환으로 제정
현행 민주당 당헌 80조는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와 관련한 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경우 사무총장이 당직을 정지하도록 한다. 정치탄압 등 부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된다면 중앙당 윤리심판원의 의결을 거쳐 징계 처분을 취소하거나 정지할 수 있게 했다.
이는 2015년 6월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가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던 시절, 혁신위는 2016년 4·13 총선을 10개월가량 앞두고 첫번째 혁신안을 발표했다. 그 중 하나가 비리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 당직을 즉시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하게 되면 그 선거구에는 무공천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무공천 원칙은 지난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당시 민주당 스스로 뒤엎었다.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헌 80조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된다면, 문 전 대통령이 당 혁신과 정치개혁 취지로 내세웠던 당의 규칙을 뜯어고치는 형국이 되풀이되는 셈이다.
부정부패 방지 관련 당내 규정은 민주당만 있는 게 아니다.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 먼저 만들었다. 2004년 3월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에서 ‘검찰 기소시 당원권 정지 및 유죄 확정시 영구 제명’을 개혁 방안으로 밝혔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밝혀지며 비리 정당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낸 혁신책이었다. 한나라당은 이 방안을 2004년 4·15 총선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으로 바뀌면서 ‘기소시 당원권 정지까지는 지나치다’는 당내 여론이 생겼다. 2018년 12월 자유한국당은 당원권 정지를 ‘당직 정지’로 개정했다. 당시 당내에서 재판 결과가 검찰의 기소 내용과 다를 수 있는데 재판 내내 당원권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부당하고 다른 당에도 이같은 규정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야당이 되면서 정치보복에 휘말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현재 민주당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행 국민의힘 당규 22조는 ①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 ②성범죄, 사기, 공갈, 횡령·배임, 음주운전, 도주차량 운전, 아동 및 청소년 관련 범죄 등 파렴치 범죄 ③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공여 및 수수, 직권남용 등 부정부패 범죄 혐의로 기소되면 당직 정지와 함께 당내 각종 경선의 피선거권과 응모 자격도 정지하도록 한다.
있으면 뭐하나···유명무실한 조항
당헌과 당규는 각 정당의 헌법이자 법률이다. 명문화도 중요하지만 당헌당규에 위배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적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소속 정치인을 당헌당규에 따라 처리하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 부정부패 엄단 조항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2009년 12월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당 최고위원 경선 자금 명목 등으로 수억원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됐다. ‘뇌물죄나 정치자금법으로 기소만 돼도 당원권을 정지한다’는 당시 당헌에 따라 공 전 의원은 최고위원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공 전 의원은 이듬해 6월까지 최고위원 직무를 그대로 수행했다. 당 내부에서는 ‘당헌이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쪽과 ‘당헌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원칙론이 부딪혔다. 2010년 6월 공 전 의원이 최고위원을 사퇴한 이유도 그 해 지방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정몽준 당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총사퇴한 데 따른 것이었다.
민주당에서 당헌 80조를 적용한 1호 정치인은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다. 2020년 9월 당시 민주당 소속 윤 의원이 정의기억연대 보조금 부정수급(보조금관리법 위반), 업무상 횡령·배임, 준사기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되면서다. 기소 당일 윤 의원이 먼저 모든 당직에서 사퇴하고 당원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그 다음날 민주당은 당헌당규에 따라 윤 의원의 당직과 당원권을 정지시켰다.
민주당은 윤 의원 당직 정지와 함께 이스타항공 대량 해고 사태 등으로 논란을 빚은 이상직 전 의원과 재산 신고 누락 및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은 김홍걸 무소속 의원 문제는 당내 윤리감찰단에 회부했다. 기소 전이라는 이유였다. 두 의원 기소 후에는 자진 탈당으로 마무리했다.
민주당이 걸을 길은 혁신? 내로남불?
당헌 80조 개정 논란은 전당대회 대표 후보인 이재명 의원 지지자들의 요구가 민주당 당원 청원 1호가 되면서 시작됐다. 일부 강성 지지자들은 이 의원이 대표가 되면 검찰 기소가 뻔하니 기소시 직무정지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원 방탄용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정치보복 차원에서 기소될 수 있기 때문에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의원 본인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검찰의 야당 탄압 통로가 된다는 측면에서 (개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9일 CBS 주관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고 말했다. 그는 “저 때문에 개정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저는 뇌물수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방탄용이라는 지적에 선을 긋기도 했다.
김용민 의원은 1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해당 규정은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고, (정치)검찰에 당직자의 운명을 맡기는 규정이라 개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개정 요구는 민주당이 세 차례 선거에서 연속 패배한 뒤 혁신을 공언했던 것과 배치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친문계 전해철 의원은 1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헌 80조를) 바꾸거나 없애는 것은 그동안의 당 혁신 노력을 공개적으로 후퇴시키는 일이며, 오히려 민주당의 신뢰 회복을 위해 더욱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 의원은 “검찰과 경찰의 부당한 정치개입 수사가 현실화됐을 때 기소만으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당헌 개정 논의는 실제 문제가 불거진 후 당 차원의 공론화 과정과 충분한 의견 수렴에 의해 검토되고 결정돼야 한다”고 했다.
대표 후보인 박용진 의원도 “국민의힘은 여당일 때든 야당일 때든 비슷한 조항을 유지했는데, 민주당은 여당 됐을 때와 야당 됐을 때 도덕적 기준이 다르다는 내로남불, 사당화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9일 CBS 주관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고 말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전준위)는 기소시 당직 정지 조항은 남겨둔 채 징계 취소 등을 의결하는 주체를 윤리심판원에서 최고위원회로 바꾸는 방안 또는 하급심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의 당직을 정지하는 안을 놓고 논의 중이다. 오는 16일 전준위 당헌당규개정분과 회의에서 일차적으로 입장을 정리한 뒤 17일 전준위 전체회의에서 의결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