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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예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에게 잘 알려주는 그림책이 한 권 있다. 영국의 그림책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1973년에 발표한 그림책 <산타 할아버지>는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가 12월24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아니, 또 크리스마스잖아!”

창밖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러나 산타 할아버지는 눈이 싫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하면서 “겨울은 너무 싫어!”라고 투덜거린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은 직장인의 월요일 아침 같다. 악천후 속에서 산더미 같은 선물의 배송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한다. 할아버지는 12월 내내 과중한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허 웃기만 하는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산타 할아버지에게도 과로로 인한 짜증이 있으며 어서 일을 마치고 싶다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린이들은 이 그림책에서 배운다.

크리스마스 새벽 무사히 할 일을 마친 산타 할아버지는 출근하는 우유배달원을 만난다. 그는 일곱 병의 우유를 들고 걷다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직도 안 끝나셨어요?”라고 묻는 우유배달원에게 거의 다 마쳤다고 웃으며 대답하는 퇴근길의 산타 할아버지는 얼마나 홀가분한 마음일까. 어린이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직업인들의 반짝이는 얼굴에서 감명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산타 할아버지에게 충분한 휴식의 권리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이런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레이먼드 브릭스는 1975년에 속편 격인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를 펴냈다. 이 책에서 산타 할아버지는 드디어 모아둔 휴가를 사용한다. 사슴이 끌던 썰매를 캠핑카로 개조하고 평소 이상적인 바캉스 장소라고 생각하던 프랑스의 캠핑장으로 떠난다.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에 실망하고 물갈이로 배탈을 겪지만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꿈의 휴가를 누리던 산타 할아버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산타 할아버지다!”라며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어린이들의 환호다. 그는 이 어린이들을 위해 일터로 돌아가 할 일을 준비한다. 어린이들은 이 책을 통해서 노동자에게는 적절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는 배달노동자로 일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쓰고 그렸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책을 찾는 독자들이 많지만 작품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노동절에 어린이와 함께 읽기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레이먼드 브릭스는 특별히 어린이만을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을 가장 사랑했던 것은 어린이였다. 자신의 작품은 우울하고 정치적이어서 누가 이런 책을 살까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고 말했지만 그만큼 독자를 많이 웃게 만든 그림책 작가도 드물다. 1982년에 발표한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핵전쟁의 위험을 예고한 작품이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바이러스의 습격과 기후 위기를 목도하는 우리들에게 이 그림책은 나빠지는 세계를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한 파국을 막을 길은 없다는 통렬한 경고가 되어 새롭게 다가온다. 그의 앞선 식견은 그림책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표현되었고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어린이들은 산타 할아버지처럼 회사에 가기 싫어서 침대에서 꾸물거리고 연·월차 휴가를 사용하는 어른이 되었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지난 8월9일(현지시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애도하면서 우리는 반세기 뒤의 어린이들을 위해 오늘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어린이를 기르는 사람은, 어린이가 읽는 책을 쓰는 사람은 현실의 과제를 수습하는 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적어도 50년 뒤의 일을 바라보고 준비하지 않는 예술은 어쩌면 늦은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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