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마산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1907~1949)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2일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303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면서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고 15일 밝혔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서훈 세번 신청 만에 독립유공자 인정[플랫]](https://img.khan.co.kr/news/2022/08/17/2022081601000782500064741.jpg)
김명시 장군은 19세이던 1925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상하이에서 항일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32년에는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심문을 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투쟁을 했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부대를 지휘하면서 ‘여장군’ 호칭을 얻게 됐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모습에 ‘백마 탄 여장군’으로도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이념 갈등으로 1948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동안 김명시 장군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해왔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처음 김명시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등록을 신청하고 올해까지 재신청과 재심의를 요청했다. 김명시 장군은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일제 강점기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21년간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에 대해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예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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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기자 jhkim@khan.kr
“백마 탄 여장군”…1949년 경찰 조사 받던 중 의문의 자살
1907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고등보통여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뽑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 6월 각국 식민지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서울로 잠입하였다.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과 함께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운동이 발각되어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출옥하였다.
1939년 재차 중국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들어가 부녀복무대의 지휘관으로 적후 공작을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텐진과 베이징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명시는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12월에 귀국하여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언론에 알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좌익계 숙청 광풍이 일어났을 때 체포되었다. 1949년 10월 10일 오전 5시 5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 수도관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실이 보도됐다. 최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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