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 전기차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도록 하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정부 대표단이 29~31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다. 미국의 이 법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인 이상, 정부는 한·미 FTA에 규정된 분쟁해결 절차로 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 서명하며 즉시 발효된 인플레 감축법에 따라 북미 지역에서 조립되지 않은 전기차는 대당 약 1000만원의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현대차·기아가 한국에서 생산하는 전기차들은 미국 시장에서 차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조치는 수입품과 국산품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한·미 FTA 2조2항의 ‘내국인 대우’를 위반하는 것이다. 내국인 대우는 협정문의 실질 내용 가운데 맨 앞에 나올 정도로 FTA의 가장 기본이 되는 약속이다.
미국은 인플레 감축법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경기부양책에 가깝다. 바이든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30%대인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마련한 법이다. 이로 인해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은 연간 10만대가량 줄어든다. 국내 일자리에도 영향을 끼친다. 현대차는 당장 미 조지아주에 2025년까지 짓기로 한 전기차 생산공장 착공 시기를 내년에서 올해 말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인플레 감축법의 영향이 현실화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국 정부의 대응이다. 이 법은 한·미 FTA 위반 소지가 있다는 점이 입법 단계에서 지적됐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FTA 분쟁해결 절차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다. 유럽연합(EU) 등과 함께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는 등 미국과 조용한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입장만 밝히고 있다. 하지만 WTO 분쟁해결 절차는 시일도 오래 걸리는 데다 다자무역기구여서 구제의 실효성도 작다. EU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미국과 FTA를 체결했다. 체결 당시 한 총리를 비롯한 통상관료들은 한·미 FTA의 효용성을 예찬했다. 그런 FTA는 이럴 때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미 FTA 위반이라고 하면서도 정당한 분쟁해결 절차를 도외시한다면 위법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밖에 안 된다. 할 말도 못하면서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