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집 주변이나 길가에서 흔히 보았던 식물이 요즘은 무척 귀해졌다. 꽈리도 그중 하나다. 늦여름 붉은빛으로 변해 홍등(紅燈)을 연상시키는 꽃받침과 그 속의 열매는 신기한 모습이었다. 특히 붉게 익은 열매는 씨를 빼고 입에 넣어 씹으면 ‘꽈~악, 꽈~악’하며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는 아이들의 노리개였다. 소싯적에 ‘꽈리 좀 씹어 보신 분’은 이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되었을 것이다. 꽈리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식물이다.
100여년 전, 독일 뮌헨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이미륵도 꽈리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있었다. 1919년 삼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수배되었던 그는 이듬해 독일로 망명하였다.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의학과 동물학을 전공하고 1928년에는 이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사색적이고 감수성이 뛰어났던 그는 1946년에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자전적 소설을 독일어로 발표해 초판이 매진되며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더 나아가 그의 글이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까지 하였으니, 독일 최초의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작가인 셈이다. 지적이고 기품 있는 풍모처럼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유려했다. 그런데 그가 독일의 문단에 등단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초기에는 낯선 풍습과 언어를 익히며 독일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면서도 끊임없이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고국산천을 그리워했다.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 끝부분에는 꽈리에 얽힌 사연이 등장한다. 그가 날마다 우체국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고국의 우편물을 학수고대했던 초창기 시절 이야기다. 편지 한 장 없이 빈손으로 힘없이 귀가하던 날, 동네의 어느 집 정원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꽈리를 보고 그는 발길을 멈췄다. 황해도 해주의 고향 집에 자라던 꽈리를 그 먼 이국땅에서 만날 줄이야. 그는 어릴 적에 갖고 놀았던 꽈리 열매를 생각하며 마치 고향에 와 있는 듯 향수에 젖어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주인이 정원으로 나오자 이미륵은 서툰 독일어로 어린 시절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추억담에 감동했던 것일까. 여주인은 꽈리 가지를 꺾어 그에게 선물하였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그리운 고향 산천을 소환한 꽈리 열매. 그 속에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미륵이 가슴에 품은 꽃 꽈리. 그에게는 향수의 꽃이자 회상의 꽃이었다. 미륵(彌勒)은 어머니가 지어준 아명. 그의 본명은 이의경(李儀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