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당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사·재판·구금된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3월 긴급조치를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 보고 국가배상 책임을 부정한 판례를 7년 만에 바로잡은 것이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가 법정에서 선언되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法諺)을 곱씹게 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A씨 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을 전제한 뒤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며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밝혔다. 대통령·수사기관·법관 등 개별 주체들의 불법행위 책임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전원합의체는 이에 따라 긴급조치 9호와 관련해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소송을 낸 A씨 등은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은 2013년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를 위헌·무효로 선언한 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 상대 손배소를 제기했다. 1·2심 재판부는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한 데 따른 것이다. 긴급조치가 위헌이지만 국가가 배상할 문제는 아니라는 판결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대법원은 위헌적 국가폭력에 면죄부를 주고 ‘과거사 역주행’을 한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서 법원행정처가 내부 문건에 이 판결을 ‘(박근혜 정부) 국정운영 협력 사례’로 기재한 사실이 드러나며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대법원이 7년 만에 판례를 변경했지만 이미 손배소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에겐 이번 판결의 효력이 소급적용되지 않는다. 피해자들 가운데 누군가는 국가배상을 받고, 다른 누군가는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는 상식과 정의에 어긋난다. 모든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 등의 구제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