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레토릭은 종종 선거철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가들의 거짓말’과 동의어로 이해되고 사용되어 왔다. 대체로 정치 레토릭은 공약과 같은 미래에 대한 약속과 관련되어 있어서 정치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 레토릭은 거짓말로 전락하고 정치가는 비판받는다. 따라서 정치 레토릭을 잘 사용하고 싶다면 진부하지 않고 신선한 언어를 찾는 것만큼이나 그 레토릭이 함축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떤 정치가의 뛰어난 정치 레토릭은 그 정치가가 적어도 이 사회가 바라는 정치적 이상을 잘 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가끔 이러한 언어의 규칙을 벗어나서 정치 레토릭을 구사함으로써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정치가들이 있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https://img.khan.co.kr/news/2022/08/31/l_2022083101001471600125501.jpg)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조선 후기 왕 가운데 언어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 레토릭을 구사함으로써 신하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세자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가 거칠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의 언어가 다른 왕들과 비교해 지나치게 날것이며, 때로는 상식에 벗어난 말들도 서슴지 않는 면모가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영조는 놀랄 만한 언어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치 레토릭은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진부해져서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가 없는데, 당시에 그런 진부한 말이 바로 ‘탕평’이라는 정치 구호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멈추고 탕평하겠다고 말하면서 자신과 사대부를 아버지와 자식에 빗대어 권위를 내세웠는데, 이 말들이 지나치게 남발되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구호가 되고 말았다.
이때 영조가 떠올린 개념이 바로 ‘개벽’이다. 영조는 1737년, 자신을 “다시 태어난 군주”라고 표현하며 격화되는 당쟁을 끝내기 위해 ‘혼돈개벽유시’를 내린다. 여기에서 혼돈은 정파 간의 대립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개벽은 이런 정치적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개벽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미래라는 약속을 포함한 정치 레토릭이기도 했다. 개벽이라는 말을 들은 사대부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영조의 언어 사용방식을 파악하고 나서 “탕평의 다른 이름”으로 폄하하거나 개벽으로 표현되는 더 나은 미래가 구호일 뿐 아니냐며 영조를 비판했다. 탕평이라는 레토릭을 썼을 때 영조는 대립하는 세력들을 설득하고 통합할 수 있는 자질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개벽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하면서 영조는 개벽 선언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것이 있냐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대부들은 개벽이라는 말까지 쓰려면 당쟁 수습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개벽은 성공적인 정치 레토릭은 아니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개벽이라는 레토릭 사용에 반대했던 이유는 개벽이 단순히 정치 개혁만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개벽은 천지개벽처럼 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개벽은, 영조를 신적 존재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과 결단을 모두 무화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영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대부들을 사형으로 다스리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성리학은 도덕적·정치적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윤리적 주체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또 조선에서 충(忠)이란, 왕에 대한 충성만이 아닌 정치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료와 사대부들은 자신들을 성리학적 주체이자 정치공동체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라고 전제하고 있었고, 그 맥락에서 왕의 정치적 판단이나 행위를 비판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영조의 개벽 선언은 영조만이 유일한 정치 주체이며 자신들은 그 결정에 따르기만 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들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