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휴대폰을 바꿨더니 걸음 수를 측정하는 기능이 생겼다. 나의 하루 걸음 수가 연령, 성별 코호트 내에서 상위 몇 %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요새 꽤 많이 걷는다며 친구에게 화면을 보여주니까,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20대 여자들은 다 헬스장 가서 뛰고 있을걸?” 내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그런 데는 갈 수 없었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역세권 임대주택을 찾다 서울 강남에 산 적이 있다. 한국에서 복지제도의 ‘수혜’를 받으며 느낀 건 온통 모멸감뿐이라 뭐든 되도록 사설 기관에 다니고 싶어했지만, 강남 사람들은 달랐다. 먼저 직장생활을 시작한 동생이 그걸 알아챘다. 우리는 함께 주민센터 헬스장에 갔다. 중년 남성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따라했는데, 등 근육을 제대로 끌어내릴 줄 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제대로 된 운동복도 없어 어색했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차에 “근데 이런 거 많이 하면 여자들은 빨리 늙어요.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지” 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신 운동을 가지 않았다. 빈곤 계급과 여성 젠더의 교차 지점에 놓인 내 몸은 번번이 소외됐고, 그 후의 이야기는 뻔했다. 얼마 전 다른 친구는 내 20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쟤는 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운동도 안 하고 힘들다고만 하지?’ 친구는 그때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다 개인의 자유가 있으니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순간 ‘대세’가 기울었다고 느꼈다. 탈코르셋 열풍과 맞물려 자연스러운 스타일이 유행하고, 더불어 몸을 움직이는 여자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힙스터’는 밤새 클럽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 요가를 하는 사람이었다. 20대엔 돌도 씹어 먹었는데 서른 마흔이 되니 전 같지 않다는 타령을 하며 흑마늘 진액을 빨아 먹는 게 보통 사람이 건강 집착 중년으로 거듭나는 전형적 스토리였다면, 이제는 몸이 모두의 화두였다.
그즈음 나도 퀴어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칭찬과 격려를 듬뿍 하면서도 외모 지적을 하지 않는 나의 운동공동체를 마냥 좋아하는 게 핵심이었다. 몇 달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식구들과의 갈등에서 더 이상 감정이 극단으로 치밀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몸을 움직이는 경험, 생활체육이 내 삶을 바꾼 경험은 압도적인 것이라, 나는 이것을 ‘자기 돌봄’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소외되던 자기에 집중하는 해방감은 관계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감각과 쉽게 연결됐다. ‘더 나아진다’는 만족감은 사회적 평가 기준에 맞춘 경쟁 구도로 빠지기 쉬웠다. 자기 돌봄은 이기심, 타인 돌봄은 희생으로 느껴지는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과학자들은 최근 감응능력(response-ability)이라는 개념을 쓴다. 이해의 틀이 없어 무시되던 미세한 신호들을 알아채는 감각이고 관계적인 윤리, 정치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돌봄이 감응능력에서 비롯된다면 그건 나에게도, 남에게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극기’도, 자기계발도 아닌 자기 돌봄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