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전방위적 위기’를
책으로 풀어낸
홍세화·이송희일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왼쪽)과 이송희일 영화감독이 지난달 30일 서울 동숭동의 흥사단 강의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기 전 포즈를 취했다. 흥사단교육운동본부가 주최하는 프로그램의 첫날 각각 2시간씩 총 4시간이 넘는 강의를 하고 난 직후 저녁시간에 시작한 인터뷰인데도, 이들은 피곤한 기색 없이 때론 나지막이, 때론 목소리를 높여 우리 사회가 갈 길에 대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문재원 기자
1979년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체류 중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망명하였다.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난민으로 인정받아, 관광 안내·택시운전을 하며 이주노동자로 생활했다. 이때 쓴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톨레랑스’의 메시지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2년 귀국 후 한겨레 기획위원, 진보신당 대표 등 언론, 출판, 교육,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현재 벌금형을 받고도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이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직을 맡고 있다. 소수자, 약자의 처지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고 글을 쓰겠다는 귀국하면서의 다짐을 지키려 애써 왔다.
1998년 첫 영화 이후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왔다.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4년 전 생각을 정리하러 전국 오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3700㎞의 여행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무너져 내리는 환경과 기후위기, 전 세계적인 위기의 풍경들을 응시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을 밤낮으로 뒤적여 공부했고, 이를 다시 SNS 공간에 공유하며 기후와 생태 이슈,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활발히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반지하에 25년째 살고 있는 도시빈민 영화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턱밑까지 차오른 복합적 위기의 실상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나온 책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는 마치 성경 속의 예언서처럼 읽힌다. 우리 시대의 전방위적 위기를 진단하고, 앞으로 몰려올 불안한 미래를 경고한다. 일견 접점이 많지 않아 보이는 저자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대번에 통했다. 책 뒤표지의 부제대로 ‘난민 이주노동자 출신 홍세화와 성소수자 영화감독 이송희일’ 둘 다 ‘차별과 혐오의 최전선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다. 책을 쓰자고 만난 이유 또한 약자들에게 더 먼저, 더욱 가혹하게 다가오는 파국의 그림자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의 날선 말들, 불편한 기억들이 작은 그림자라도 얹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세화)” “급진적으로 흔들어 전환하지 않으면 약자들에게 힘든 세상이 가속화될 것 같아서 사회적 발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참여하게 됐다(희일)”고 했다.
인간, 합리적 아닌 합리화하는 존재
사회적 소수자가 돼야 자기 돌아봐
한국의 교육, 경쟁지상주의에 포획
우리는 과연 어떤 문 앞에 서 있는지, 우리 사회의 현주소부터 질문했다.
홍세화(이하 홍) = 그야말로 한국은 현재 편견과 몰상식이 판치는 경제동물로 살찌고 있죠. 동물성이 강화되고, 인간정신은 말살되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송희일(이하 이송) =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에게도 90년대 초반 차별과 혐오를 걷어낼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곧 IMF 외환위기가 왔고 ‘여러분 부자 되세요’ 광고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들어와 확산됐죠. 그때부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의 가치와 가치사슬의 문제가 됐고, 다수가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능력주의는 차별, 혐오와 짝을 이뤄, 이젠 어디서나 차별과 배제가 공기처럼 사회 곳곳에 만연돼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홍 = 2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게 대형 전광판의 ‘부자 되세요’ 광고카피와 공중파TV 광고 속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같은 말들이었어요. 그때 경악했던 배금주의가 시간이 갈수록 하늘을 찌를 기세입니다.
-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강한 차별과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홍 = 근본원인은 분단상황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가치가 집단에 의해서 밀려나는 경험이 차별과 혐오를 굳게 만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 하지만 실은 합리화하는 존재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우열관계로, 성소수자는 정상 비정상 관계로 치환해서 합리화하는 것이죠.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맞습니다. 외국에서도 곳간이 줄어드는 상황이 약자들을 밀어내는 극우의 텃밭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송 = 한국은 나름대로 경제성장을 했는데도, 이 지경인데 성장이 정체된다고 할 때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홍 =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난민들의 정부였고, 우리는 그 후손들 아닌가요? 결국 민도의 문제이고 사회의 품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민성의 부재로 소수자와 약자들에 대한 연대와 공존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송 = 1990년대만 해도 설사 위선이라 하더라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시민교양과 윤리가 어떤 형태로든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점점 공론장도 붕괴되고 공공성도 휘발되는 느낌입니다.
홍 = 어느 사회나 다수에 속해 있으면 차별을 잘 모릅니다. 사회적 소수자가 될 때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등은 공교육에서 짚고 가야 하는데 한국의 교육은 완벽하게 신자유주의, 경쟁지상주의에 포획돼 있는 것이죠.
지구, 생태학적 한계 초월한 상태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뿌리는 같아
이 두 가지 문제 끊임없이 말해야
- 가장 걱정되는 기후위기 얘기를 해 볼까요. 이송감독은 책에서 “2021년은 마치 예고편처럼 종합적인 기후위기의 풍경을 눈앞에 보여줬다. 앞으로 우리들은 언젠가 2020년을 평화로운 해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이송 = 기후위기를 부정하던 외국의 리더들까지 이게 다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기후위기와 식량, 에너지, 이주민, 난민 문제 등은 모두 엮여 있습니다. 어쩌면 성장 일변도의 생활양식을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지구는 생태학적인 한계를 초월한 상태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파국이냐, 기존 시스템에 대한 반격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죠.
홍 = 자연의 역습은 본질적으로는 희망적이라 볼 수 있죠. 인간은 죽인다고 하면 굴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반란은 주인만 바뀔 뿐 노예 처지는 그대로인, 항상 실패한 반란인데, 자연은 굴종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세계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이 사회 변화에 우군일 수 있죠.
이송 = 미국의 좌파 청년운동이 정부에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라고 압력을 넣는 상황을 보며 ‘기후비상사태’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기후위기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죠. 기후 비상사태라는 말은 사회 시스템을 비상사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운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현실에 답답해하는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점은.
홍 = ‘잡초를 없앨 순 없지만 뽑을 순 있다’는 격언의 메시지를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만, 잡초에도 존재 이유가 있다는 생태적 관점 대신, 나쁜 의미로만 한정해서요. 사람들은 세상이 불평등과 차별, 위선, 갑질 등으로 가득찬 잡초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잡초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잡초 뽑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나선다면 줄일 수는 있습니다. 좌절, 단념하거나 냉소에 그쳐선 안 된다는 것, 일상 바꾸기가 무척 중요하다는 점을 당부합니다.
이송 = 일단 모입시다. 9월24일 서울광화문광장 ‘기후정의행진’에 나와주세요.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원인과 결과는 뿌리가 같습니다. 대선 때까지라도 이 두 가지에 대해 계속 말해야 합니다. 시스템이라는 큰 싸움과 일상 속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전환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더욱 자세한 두 사람의 대화와 강연은 오는 23일부터 시작되는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의 3회 연속 강좌 ‘쌤과 함께, 책과 함께, 똑똑한 금요일’에서 들을 수 있다.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라’ ‘차별·혐오공화국을 해부한다’ ‘한국 진보정치, 희망이 있나’ 순으로 진행된다. 저자들은 ‘시민과의 소통’이라는 취지에 공감해 후마니타스연구소의 새 프로그램인 독서기반 강좌 첫 순서를 맡아달라는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