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당원들이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여 최근 불거진 ‘제2의 n번방’ 사태와 관련해 성착취물 제작·유통·소지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2년 전 ‘n번방’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에는 ‘엘(L)’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용의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피해자를 유인해 강제로 성착취물을 찍게 했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제작된 영상은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해 유포됐다.
엘의 범행 시작 시기는 2020년 중반으로 추정된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n번방’ 운영자 문형욱이 구속될 무렵이다. 엘은 n번방 사건을 파헤친 ‘추적단 불꽃’의 활동가 등을 사칭해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 ‘텔레그램상에 당신의 사진과 개인정보가 퍼지고 있으니 도와주겠다’며 피해자들을 유인한 엘은 이를 빌미로 성착취물을 찍어서 보내도록 강요했다.
엘은 1분에 80여개가 넘는 메시지를 보내며 14살인 피해자를 압박했다. 피해자는 50개가 넘는 사진과 영상을 엘에게 보냈다. 엘이 이런 수법으로 제작·유포한 성착취물은 350여개에 달한다. 엘의 범행이 알려진 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단체에는 의심 제보가 쇄도하고 있다. 피해자 수가 최근까지 알려진 6명보다 많은 10여명에 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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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은 2년 전 n번방 사건과 마찬가지로 나이 어린 피해자들을 협박해 성착취물 제작을 강요하고, 피해자들에게 모욕적인 별칭도 붙였다.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의 신체에 표식을 남기는 것도, 텔레그램 대화방을 활용해 영상을 유포하는 것도 2년 전 그 때 그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엘은 일정 기간 고정적으로 텔레그램 대화방을 운영했던 조주빈 일당과 달리 대화방을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텔레그램 닉네임과 아이디도 계속 바꿨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흔적이 남을 만한 것들은 모두 삭제한 것이다. 또 엘이 운영한 대화방에서는 성착취물 공유 대가로 금전이 오간 거래내역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가 2021년 발표한 초·중·고등학생 디지털성범죄 피해 실태를 보면, 서울에 거주하는 12∼19세 초·중·고등학생 4012명 중 21.3%(856명)가 ‘디지털성범죄 위험에 직접 노출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시민단체들은 경찰의 늑장 대응을 비판하고 있다. 경찰이 이번 사건 피해 신고를 지난 1월에 접수하고도 8월이 돼서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 전담수사팀(TF)을 꾸리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 사이 엘은 지난달 30일 텔레그램에 접속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춘 상태다.
배수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아동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은 “디지털 성착취 사건은 그간 발각되거나 부각되지 않았을 뿐 2년 전 조주빈 사건 이후에도 꾸준히 발생했다”고 말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센터의 지원을 받은 피해자는 총 6952명에 달한다. 이는 2020년 대비 1.4배 증가한 수치다. 배 변호사는 “(트위터, 텔레그램 등)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 디지털 성착취 사건의 온상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규제책이나 처벌 규정이 미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