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는 공대생이었다. 과에 단 한 명도 없었던 여자 선배들을 찾아 공대 여학생 모임에 드나들던 나는,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그 언니들과 함께 NGO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일종의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러 사회단체들 중에서 나는 한국성폭력상담소로 신청해서 가게 되었다. 자원활동이라 해서 뭔가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했던 건 아니었다.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상태라 일은 많은데 활동가는 부족하고 성폭력전문상담소도 턱없이 부족한 때였다. 그때 활동가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꽂힌 얘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는 의료 지원이 절실한데, 너무 부족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진료하고 증거를 채취해 줄 의사, 법정에서 증언을 해 줄 의사, 다가올지도 모를 임신이나 성병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의사, 심리적 외상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의사가 너무 필요했다. 그때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공적인 의료지원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때였으니, 더욱 필요했다.
수능을 다시 쳐서 의대에 들어갔다. 의사가 되면 막연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길고 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나오니, 전국에 권역별로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원스톱센터·해바라기센터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굳이 자원할 필요도 없이, 전공의 수련병원에서의 당연한 당직 근무로 성폭력·가정폭력 원스톱센터(해바라기센터)에서 피해자를 진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병원의 당직체계상 야간에 원스톱센터를 방문한 피해자들은 응급실 당직 전공의가 진료 및 증거채취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개월 후 나는 그 응급실에서 진료했던 성폭력 피해자와 관련한 재판에 증인으로 서게 되었다. 증인으로서 응급실에서 보았던 피해자의 모습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의식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부르고, 흔들고, 얼굴을 찰싹 때리고, 몸을 꼬집었을 때에도 여성 피해자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던 것, 가슴과 무릎의 커다란 멍 자국.
내 증언이 끝나자 가해자 측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하겠다고 나섰다. 고개를 돌려 변호사가 있는 오른쪽을 보는 순간 나는 피의자 그러니까 가해자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베이지색 수의를 입고 변호사 옆에 앉아 있는 그. 나는 가해자를 대면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지 살짝 오한을 느꼈다. 증인 심문을 하기 전에 내가 어디에서 일하는 누구인지를 얘기했던가? 저 가해자가 내 이름과 직장을 기억할까?
변호사는 응급실에선 매일 수십명의 환자들을 볼 텐데 어떻게 이 여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하루에 수십명 진료를 한다고 해도, 성폭력이나 강간으로 오는 환자는 많지 않으니 잘 기억이 난다. 그 사건은 나에게도 특별한 사건이었으니까. 그날 피해자의 몸에 있던 상처들 증거사진은 내가 직접 촬영한 것들이었고, 나는 법정에 오기 직전에 그날의 진료기록을 다시 한번 챙겨보고 왔다.
나는 내가 실제로 보고 겪은, 하지만 그에게 불리할 증언을 한 셈이다. 베이지색 수의의 가해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10년도 넘은 일이었는데, 그 수의가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오늘에서야 알겠다. 내가 안전하게 증언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것을.
내 언니가 얘기했다. “가해자가 네 이름이나 직장을 기억할까봐 좀 걱정이네. 너는 이름도 흔하지 않으니.” 내가 느낀 오한이 아예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건 두려움을 느껴본 이들 사이의 연대 같은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