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떴다. 향년 96세. 서거 이틀 전까지 화사하게 웃으며 신임 총리를 맞이했으니, 이쯤 되면 가히 호상이라 할 만하다. 23년 전 조선시대 진연(進宴)에 버금가는 여왕의 73세 생일상을 우리가 차려줬던 터라 더욱 감회가 새롭다.
여왕은 1999년 4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중 안동 하회마을 방문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안동시에서는 하회마을의 민박간판과 음식점 등을 정비하고 자판기도 철거했다. 여왕을 위한 배려가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알 수 있다.
고추장 담그는 법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여왕은 직접 손가락으로 고추장을 찍어 맛보기도 하며 우리 전통 음식에 대한 관심을 표했다. 영국 언론에서는 여왕이 충효당을 오를 때 우리 예법대로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간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여왕은 평생 식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영국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정원박람회 첼시 플라워쇼에 빠짐없이 참석하던 열혈 팬이었다. 그래서일까. 여왕의 시신이 밸모럴성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이동하면서 관을 장식한 화환은 날짜별, 장소별로 다양했다. 달리아, 장미, 프리지어, 백합, 로즈메리 등으로 꾸며지다가, 장례식이 거행된 지난 1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영국산 참나무, 펠라르고늄, 유스토마 외에도 머틀(Myrtle)로 장식되어 있었다.
매력적인 향기를 내뿜는 머틀은 우리말로 도금양이라고 불린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머틀은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목이다. 영국에는 16세기에 도입되었으며, 왕실의 결혼식 부케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여왕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도 결혼식에 머틀로 장식한 화관을 썼다고 한다. 이런 전통에 따라 194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식 부케에도 머틀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왕실의 정원에 기르던 머틀의 가지를 잘라 장식한 것이다. 가장 최근에 결혼한 해리 왕자의 신부인 메건 마클의 부케에서도 어김없이 머틀이 함께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도 끊임없이 꽃을 찾아다녔던 엘리자베스 2세. 단호한 표정 속에 숨어 있던 온화한 미소는 꽃을 사랑했던 그의 성정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장례식을 집전했던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가 여왕을 떠나보내며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