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소녀의 어깨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소녀의 어깨

입력 2022.09.29 03:00

수정 2022.09.29 03:02

펼치기/접기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잔뜩 긴장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우리였지만, 이제 친구에겐 ‘용돈을 올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아들과, 공원 세 바퀴를 혼자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는 작은딸 하나가 있으니 대화의 주제도 예전과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육아 브이로그와 양육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을 찾아보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검색하며 어색해질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이제 막 세 살이 된 친구의 딸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과연 공원을 정복한 어린이다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오는 길에 검색했던 만화 캐릭터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대뜸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 어릴 때랑 하는 짓이 똑같대”했다. “그래? 외적으로는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데?” 하고 돌아보니 야구 글러브를 머리에 쓰고 고무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맞다. 저 모습은 온 동네 골목을 세발자전거 하나로 누비며 모기차를 따라다니던 영락없는 너의 모습이다. 네가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릴 때 그 뒷자리엔 항상 내가 앉아 있었는데 나는 왜 너를 만나기 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걸까?

초등학생 때 우리는 늘 동네 저수지에서 물총싸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사람이 적으면 재미없다고 먼 동네 아이들을 일부러 도발해 동네 대항전을 만들기도 했고, 가끔 장난이 지나치다고 지나가던 어른들이 꾸짖으면 그 꾸중을 향해 반항하다 단체로 벌을 서기도 했다. 학교에서 공을 쓰는 운동을 배우고부터는 늦은 저녁 조를 짜서 배드민턴과 족구를 했고, 뛰어 노는 게 지칠 무렵엔 오락실로 가서 펌프를 뛰고 철권을 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의 방식대로 뛰고, 싸우고, 놀았다.

친구가 딸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치우며 4인용 소파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밀었다. 내가 도와주려 하자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기억 안 나냐? 나 체육시간에 투포환 잘해서 소년체전 나갈 뻔한 거?” 중학교 체육시간 때였다. 학생주임이었던 체육선생님이 친구의 투포환 기록을 보시더니 나와서 두 번 정도 더 던지게 했다. 친구가 힘껏 던질 때마다 기록은 더 좋아졌고 선생님은 ‘대회에 나가봐도 되겠는데?’ 하셨다. 그런데 그때 앉아서 구경을 하던 반 남자 아이들이 친구를 향해 ‘힘센 여자’를 조롱하듯 말하고 웃기 시작했다. 뒤늦게 선생님이 나서서 제지했지만 친구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그때 왜 그랬지? 출전하면 메달 땄을 수도 있었는데…. 선머슴에서 소녀가 되어가던 때라서 그랬던 거 같아. 힘센 게 괜히 부끄럽고.” 친구가 말한 ‘소녀가 되어가던 때’를 나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의 변화를 느낄 때,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인식하고, 교복 치마의 길이와, 교복 셔츠 안의 속옷을 단속 당하며 몸을 드러내는 것에 조심성이 요구될 때. 자꾸만 위축되고 더 이상 전처럼 뛰거나, 싸우거나, 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던 바로 그때를.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와 TV를 봤다. 송구 능력이 떨어지는 외야수는 ‘소녀 어깨’가 되고, 경기를 하다 급소를 가격당한 격투기 선수는 곧장 ‘언니’가 되는 ‘밈’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스포츠 예능이었다. 그 선수의 플레이에 한참 몰입해 대신 쾌감을 느끼다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뭘 못하거나 무언가를 잃어야 소환되는 ‘소녀’와 ‘언니’라는 멸칭은 뭘 못하지도, 뭘 잃지도 않은 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녀였을 때 눈치 보며 포기했던 많은 자유들을 전부 되찾고 싶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내가 따지 못한 투포환 메달. 우리 딸은 딸 수 있을지도?’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