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1000장을 따면 1㎏들이 소쿠리 1개가 가득 찼다. 그렇게 하루에 소쿠리 40개를 채울 깻잎 4만장을 따야 했다. 농장주는 “소쿠리를 세어 하나라도 덜 하면 소쿠리 1개당 1500원씩 임금에서 깎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A씨는 농장주의 엄포에 어쩔 수 없이 동의서에 사인해야 했다.
전북 익산의 농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B씨의 숙소 화장실은 비닐하우스와 비닐하우스 사이의 도랑이다. 비닐하우스 기숙사 밖에 임시가건물 화장실이 있지만 문과 변기가 고장났다. 사장은 화장실을 고쳐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볼일을 하우스 사이에서 본다”는 그는 화장실도 없는 비닐하우스 기숙사에 살며 월 25만원을 내고 있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영락없는 ‘착취 공화국’이다. 임금체납이 만연하고 쉬는 시간은 거의 없다.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 화재에 취약한 패널 가건물을 숙소라고 제공하면서 기숙사비를 공제한다. 남성 농장주들은 여성 노동자의 샤워실을 엿보거나 성폭력을 저지른다. 지옥 같은 일터에서 벗어나려 해도 농장주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주노동자들은 자꾸 비참해지는 마음을 꾹 누른 채 깻잎을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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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119’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윤미향 무소속 의원실은 1년간 캄보디아 출신 농업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상담사업을 진행한 결과, 344명이 임금·숙소·성폭력 등 문제를 상담해왔다고 27일 밝혔다. 여성 노동자가 72%, 남성 노동자가 16%였다. 12%는 성별을 기재하지 않았다.
이주노동119는 지난해 금속노조 경남지부가 주도해 꾸린 연대단체다. 지구인의정류장·이주노조 등 이주노동·인권 관련 단체들이 모였다. 이번 조사는 단체 출범 후 첫 사업으로, 이들은 2021년 9월1일부터 2022년 8월31일까지 전국 농장을 돌아다니며 대면·전화·온라인으로 캄보디아 출신 농업 이주노동자들을 중점적으로 상담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고용허가제(E-9)를 통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 1만501명 가운데 캄보디아 출신은 3477명으로 허가제 도입 16개국 중 가장 많다.
이주노동자 344명이 이주노동119에서 상담한 사건은 594건이었다. 한 사람이 복수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상담 사유를 집계한 결과 ‘사업장 변경’ 문제가 114건으로 가장 많았다. 임금체납·초과노동임금 등 ‘임금’ 문제가 87건으로 뒤를 이었다. ‘기숙사(부적합한 숙소, 과도한 숙소비 등)’가 83건, ‘의료(코로나19, 병원이용 등)’가 66건, ‘강제 파견’이 59건이었다. ‘노동시간(45건)’ ‘체류 문제(26건)’ ‘성폭력 및 폭행·폭언(19건)’이 뒤를 이었다.
임금의 경우 지급일에 지급되지 않는 사례부터 연장노동수당을 통째로 떼이는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경기 포천시의 한 이주노동자는 근로계약 당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기로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일하고 월 175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충북 금산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일했다. 계약서상 휴게시간은 3시간이지만 실제로는 1시간 쉬고 2시간을 더 일했는데도 임금은 주지 않았다”며 “증거를 모아 노동부에 갔지만 노동부에서 제대로 조사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농장주들은 일한 만큼 돈도 주지 않으면서 다른 농장으로 ‘강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주로 농장주의 가족, 친척, 이웃, 지인의 농장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아버지와 아들 명의로 이주노동자 18명을 고용해 포천 일대 수십 개 밭을 돌아다니며 일을 시키고 있다(경기 포천)”거나 “충남 논산에 숙소를 두고 5명을 충남 홍성과 부여, 전북 등 수십 곳의 양계장에 차로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켰다(충남 논산)”고 증언했다.
여자 샤워실에 구멍 뚫고 훔쳐본 한국 사장님
비닐하우스·가건물 등 열악한 기숙사는 이번에도 도마에 올랐다. 기숙사 관련 문제를 상담한 83명 중 숙소 유형을 밝힌 이들은 총 66명이었는데, 절반가량인 30명이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샌드위치패널 가건물 거주 15명, 컨테이너 8명, 아파트 6명, 폐가 5명, 식당공간 거주가 2명으로 뒤를 이었다. 이들은 이 같은 숙소에 사는 대가로 매달 1인당 최소 20만원에서 최대 45만원에 이르는 기숙사비를 냈다. 아예 하루 2시간 치의 임금을 기숙사비 명목으로 떼어가는 사례도 있었다. 경남 밀양의 한 노동자는 “샌드위치패널 숙소인데 비가 오면 침수돼 뱀껍질과 거머리가 숙소로 들어온다. 욕실에 천장과 문이 없고 화장실은 바깥에 있다”고 했다.
열악한 숙소는 성폭력에 특히 취약했다. 강원 횡성의 한 여성 노동자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살았는데 사업주가 성추행하려고 해 도망 나왔다”고 했다. 2021년에는 충남 논산에서 40대 농장주가 겨울에 춥다며 20대 여성 노동자를 아파트에서 임시로 지내게 하며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일도 있었다. 샤워시설이나 화장실이 야외에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불법촬영도 수시로 일어난다. 지난 7월 전북 익산에서는 농장주가 여성 노동자 숙소의 패널 가건물 샤워실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다가 들통나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변경했다.
이주노동119는 “농촌의 외딴 곳에 숙소가 있어 고립된 환경일뿐더러 종속적인 농업 이주노동자의 지위, 외부로 문제 제기하기가 어려운 점 때문에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으면서 성폭력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며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그 발생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상담통계로는 잡히지 않는 끔찍한 현실”이라고 했다.
벗어나려 해도 악덕사장 동의 필요···“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코로나19가 농촌까지 휩쓸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진료조차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떠안았다. 대다수 상담 사례는 언어 장벽으로 의료정보 접근이 어려워 병원 이용을 문의하거나 전화 통역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코로나19 확진에도 일을 시키거나 자가격리 비용을 요구하는 등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경남 밀양의 한 노동자는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코로나19 격리비용’ 명목으로 140만원을 물었다. 또 다른 노동자는 이주노동119에 “코로나19에 걸렸는데 팀장님이 몸이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했더니 나와서 일하라는데 일해도 되나”라고 상담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같은 불합리한 대우나 폭력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있게 돼있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사업장 변경에 사업주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119에는 농장주들이 ‘사업주 동의’를 악용해 노동자들을 통제하거나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가장 많이 접수됐다. 경남 밀양의 여성 노동자 2명은 난방이 되지 않는 컨테이너 숙소, 계약서에 없는 주소 근무 등에 질려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더니 “1인당 560만원을 내면 서명해주겠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주노동119는 “겨우 떠난 농장에는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배정되고 그들은 같은 문제를 고스란히 겪으며 또다시 사업장 변경을 원한다”면서 “더 이상 정부는 이주노동자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떠나지 않고 지속해서 일할 만한 환경, 최소한의 인간답게 일할 환경을 만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윤 의원은 “농업 이주노동자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현행 숙식비 지침의 폐지와 함께 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계절근로자제도 정책 개선에 나서야 한다.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돼야 농촌이 지속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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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람 기자 lenno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