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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상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그냥상

물장화 고무장갑 냅다 던지고

고무줄바지 낡은 버선 돌돌 말아 처박고

꽃내 분내 관광 간다

굼실굼실 떡도 찌고

돼지머리 꾹꾹 눌러

정호반점 앞에서 새벽 버스 한 대

씨바씨바 출발이다

소주도 서너 박스 맥주도 서너 박스

행님아 아우야 고부라지며

자빠질 듯 자빠질 듯

흔들며 흔들리며

간다, 매화야 피든 동 말든 동

간다, 빗줄기야 치는 동 개든 동

죽은 영감 같은 강 따라

술 마시고 막춤 추며

씨바시바 봄이 간다

-시, 「씨바씨바」, 권선희, 시집 <꽃마차는 울며 간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권선희는 최근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포항 구룡포에서 산다. 20년 가까이 사는 포구에서 중대장각시로 불리는 그는 짠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홍게나 오징어 과메기나 자연산 미역 등 철철이 귀한 것들을 얻어먹고 산다. 그중 일부는 멀리 사는 친구들 입에도 들어간다. 동네 어른들은 물론 ‘종팔씨’나 ‘흰돌이’ ‘쫄쫄이’ 등의 개들까지 어울려 산 덕이다. 이웃과 행님 아우로 지내게 된 데는 시간도 필요하고 억측과 오해와 뒷담화와 거리 두기도 따랐다. 처음엔 뭐 하나가 동네 굴러들어와 사는데, 뾰족구두 신고 굽실굽실 노랑머리에 빨강바지 입고 막걸리나 마시고, 포구 온천지로 싸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영낙없이 다방 레지였겠다.

그 노랑머리 여자가 신원 분명한 예비군중대장 각시라는 것을 알았어도 괴이하긴 마찬가지. 어느 땐 어판장 바닥에서 괴기도 만지작거려쌓고, 덕장에 퍼질러 앉아 이바구도 하고, 관광차 안에서 막춤도 추는데, 더 놀라운 것은 아 글쎄, 그 노랑머리가 ‘무슨 시인이라카는 사람’이라는 소식. “시인이 머시라? 고래 잡고 오징어 낚고 청어 배 째가 말리고 물질하는 사람들하고 놀믄서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라?” 그런 노랑머리한테 작년에 동네 사람들이 맘을 모아 상을 준다는 소식이 왔단다. 무슨 상이요? 물었더니 그냥 상이라고, 서류도 일절 필요 없고 수협 와서 커피도 한 잔 하고 총무과장만 딱 5분만 만나고 가면 된다고. 돈 많이 주면 부담스러워 안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300만 주자고, 아무 이름도 달지 말고 그냥 주자고 회의도 여러 번 했단다. 그래도 상인데 어찌 그냥 가나. 꽃단장하고 갔는데, 웃음도 나오고 코도 빨개지고 주책없이 눈물이 흐르더란다.

어제 아침 우리 동네 어른들이 마을회관 앞에 집합했다. 코로나19로 마을회관이 폐쇄되고 집합이 금지된 지 3년 만의 단체 나들이였다. 중절모와 스카프를 자주색으로 통일하고 검은 바지에 하얀 상의를 입은 한씨 어머니와 살랑살랑 감빛 스카프를 두르고 커다란 주홍빛 꽃이 핀 양장을 한 맹씨 어머니와 작년에 영감님 영영 보내고 부쩍 마른 김씨 어머니도 간만에 나와 계셨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절로 몸이 흔들거리는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고, 젊은 언니들이 준비한 음식들을 돌렸다. 물과 떡과 감과 바나나와 음료수가 든 봉지가 묵직했다. 한 손에 소주병 한 손엔 오이 안주 들고, 한 손에 커피 한 손에 장어 안주 들고 비틀거리며 서빙했다. 오이 껍질 반쯤 잘라 먹기 좋게 잘라 넣고, 장어 쪄서 양념장 발라 살짝 구운 장어구이까지 만들고 떡 맞추고 심부름하고 섭외하는 일은 60대 후반과 70대 초반인 젊은 언니들 몫. 연령상 진짜 젊은이가 희소한 농촌에선 75세 이하면 어른 축에도 못 끼니까. 엊그제까지 밭이랑 위에 덥석 앉아 고구마 캐던 흙 묻은 장갑과 장화와 몸빼 벗어던지고 갔다. 나이로나 농민으로나 자격미달이지만 평생 밭고랑에 엎드려 살아온 분들께 맘속으로 ‘그냥상’ 하나씩 안겨주며. 손잡고 부축하고 흔들리며 노래하며 갔다. 아딸딸 술김에 민주노인당과 민주농민당도 꿈꿔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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