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와 함께 미국의 금리 인상 및 킹달러로 거의 모든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서, 순순히 기존의 지구화 및 금융화 준칙을 따를까
이번 사태는 개발도상국들만 아니라 영국과 같은 선진산업국들조차 견디기 힘든 상황임을 보여준 ‘탄광 속의 카나리아’ 사례다
경제 고통을 해소하려 친자본적 정책을 취하며 국제적 준칙에 도전하는 ‘우익 포퓰리즘’도 그 윤곽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9월 말의 세계 금융시장은 영국발 위기로 큰 소란을 겪고 있다. 1파운드의 가치는 잠시 1달러 아래로까지 떨어졌고, 영국의 장기 국채 금리가 주식시장의 등락을 능가하는 큰 폭으로 치솟는 진풍경이 벌어졌으며, 전 세계의 투기 자본은 파운드화의 몰락을 확신하며 떼로 덤벼들었다. 가뜩이나 상승한 ‘킹달러’는 더욱더 강세를 보이며, 전 세계 대부분 나라의 환가치 하락 압력을 증대시켰다. 혹자는 영국이 1976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IMF 구제금융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세계 금융시장의 대혼란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예언까지 내놓고 있다. 지금은 영국 정부가 한발 물러서면서 외환시장과 국채시장이 안정을 찾고 있지만, 아직 그 예후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사태의 원인은 지난 9월21일(현지시간)과 22일에 보수당 내각의 트러스 총리와 콰텡 재무장관이 내놓은 ‘미니 예산’이었다. 영국 정부 예산책임청의 평가도 없이 이들이 들이민 예산의 내용은 침체에 빠진 영국 경제의 획기적인 성장을 위해 획기적인 감세정책을 행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는 크게 세 가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2년간 혹은 그 이상 대대적인 정부 보조금을 퍼부어 2년간 에너지 가격을 동결시킨다. 둘째, 투자와 경제 성장을 끌어내기 위해 고소득층과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세 등의 조치를 행한다. 셋째, 기존 혹은 새로 계획된 각종 사회 복지 정책을 대규모로 철폐한다.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첫째, 이는 노골적인 계급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13%에 달할 것이라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가뜩이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서민들에게 가혹한 복지 삭감이라는 폭탄을 안기는 대신, 부자들과 기업들에는 ‘인센티브’라는 미명 아래 화끈하고 달콤한 혜택을 안겨주고 있다. 에너지 가격 동결 보조금의 주된 수혜자가 기업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 소득세 개편으로 감세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연봉 2억원 이상의 사람들이며, 중산층은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세금을 더 내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의 과도한 위험 행동을 막기 위한 장치로 마련된 은행 경영진 보수의 상한제까지 폐지되었다. 둘째, 이는 지난 30년간 상식처럼 굳어지고 준수된 지구적인 금융 기율의 원칙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50년 만의 대규모 감세’와 대규모의 에너지 보조금 지출이 결합될 경우 이것이 국가 부채 폭증과 파운드화 가치 하락 압력을 낳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가뜩이나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미국으로의 자금 유입으로 세계 경제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마당이니, 이 상황에서 이러한 무책임한 재정정책을 내세운다는 것은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의 기본 준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이 아닌가.
‘미니 예산’ 완전 철회는 속단 못해
따라서 발표 다음날인 9월23일부터 파운드화 가치와 영국 국채 금리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금리의 불안정으로 인해 은행 등 금융기관이 주택담보대출을 중지하기 시작하는 사태까지 나타났다.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이례적으로 긴급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 ‘미니 예산’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금융시장의 안정성에도 큰 위협이 되므로 철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영란은행은 그전부터 독립성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기준금리 인상 기조는 물론 국채 매도를 통한 유동성 회수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며 엇박자를 냈다. 경제 매체들은 물론 유수한 경제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마침내 국채 금리 폭등으로 영국의 연기금들이 금리 관련 파생상품의 “마진콜” 급증의 위기를 겪게 되었고, 영란은행이 할 수 없이 29일 급하게 정책을 뒤집어 국채 매수에 나서 겨우 약간의 진정 기미를 보이면서 지난주의 시장이 마감되었다.
하지만 이 난리를 겪은 후에도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요지부동이었다. 9월30일 총리와 재무장관과 예산책임청이 45분간 긴급 회동을 가졌지만, 그 후에도 재무부는 이 ‘미니 예산’에 대한 총체적 평가 보고서는 멀고 먼 11월23일에나 나올 것이라고 못 박았다. 트러스 총리는 10월1일과 2일의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이 예산안을 굳건하게 밀고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10월3일이 되자 결국 물러서게 된다. 콰텡 장관은 이 예산의 핵심 중 하나라 할 고소득자 감세정책을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트러스와 콰텡은 예산책임청과 다시 회동을 갖겠다고 했다. 파운드화는 시장에서 즉각 반등하여 ‘미니 예산’ 발표 이전의 가치를 회복하였고, 국채 시장도 안정세가 뚜렷하다. 이 법안에 대한 영국 여론의 반발이 워낙 거세고 특히 주담대가 막힌 이들의 반항으로 보수당 내에서도 이 예산이 통과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 의원들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전언이다. 일단은 소란이 진정된 국면이다. ‘가미카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콰텡 장관도 창피스러운’ 패퇴를 당했으니 결국 ‘미니 예산’ 자체도 철회될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을 떠돌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 구체화되는 형국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종주국’ 영국 정부가 벌였던 이러한 행동은 애초부터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10월3일의 ‘U턴’이 곧 기존 예산안의 기조를 완전히 철회하는 계기가 될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트러스 총리도 콰텡 장관도 자신들의 예산안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확신은 바뀌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이 ‘배부른 자들에게 퍼주기’라는 이념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여론을 따른 것뿐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함부로 날뛰던 영국 정부가 국채 시장의 ‘자경단’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형국이지만, 확실한 결말은 올해 말 실제의 예산안이 나올 때가 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이번 ‘해프닝’에서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의 윤곽을 좀 더 뚜렷이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가분으로 엮여 있었던 지구화 및 금융화에 대한 신념과 감세 및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신념이 쪼개지면서, 후자만을 취하고 전자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려는 흐름으로 ‘우파 포퓰리즘’이 구체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브렉시트야말로 바로 이러한 경향이 낳은 결과였다. 영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한 결과 이득을 본 것은 ‘폴란드 노동자들과 시티의 금융 세력뿐’이고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빈곤으로 내몰렸다는 불만이 노골화된 것이었다. 비록 코로나19 사태라는 암초에 걸려 잠시 헤매기는 했지만, 보리스 존슨 내각 이후로 영국은 지구적 시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스스로 키워내는 국민경제로 일어서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이 마주친 상황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런던의 금융 허브 지위가 추락하였으며 관세의 재도입 등으로 수입물가가 상승하고 가격 경쟁력이 후퇴하였기에 경제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경제 성장을 위해 무언가 강력한 한 방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미카제” 콰텡 재무장관의 외침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록 압도적 여론에 밀려 후퇴하기는 했지만, 영국 내부의 우파 싱크탱크들과 재계 및 산업계의 목소리는 대부분 이 ‘미니 예산’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인플레이션과 함께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및 달러 가치 상승으로 인해 거의 모든 나라를 자본 유출, 환가치 위기, 금리 상승, 경기 침체, 물가 상승 등의 위협이 번갈아가며 혹은 동시에 떼로 덮치는 상황에서 이들이 순순히 기존의 지구화 및 금융화의 준칙을 교과서 그대로 따르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의 세계 경제는 개발도상국들만이 아니라 선진산업국들 또한 대부분 국가 부채와 민간 부채를 잔뜩 안고 있는 상태이다. 황새처럼 뛰어 올라가는 달러화의 가치와 미국의 기준금리를 이 뱁새들이 계속 쫓아가는 일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이번 사건은 끝이 아닐 것이다. 어느 매체의 논평처럼, 이번 사태는 개발도상국들뿐만 아니라 영국과 같은 선진산업국들조차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 ‘탄광 속의 카나리아’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일국 내의 경제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친자본적 정책을 취하면서 국제적 준칙에 도전하는 ‘우익 포퓰리즘’도 그 윤곽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