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나는 석 달 열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물론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젖을 물려도, 기저귀가 젖지 않았는데도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 아버지가 번갈아 업어 재우던 어느 날 울음을 뚝 그쳤는데 그게 마침 100일째였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상가에 다녀온 일꾼이 괭이 가지러 금줄을 제치고 집 안에 들어온 탓에 부정을 탔노라고 굳게 믿었다. 젖먹이가 우는 일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5~19%에 달하는 영아는 그 울음이 좀 별나다. 3주에서 석 달에 걸쳐 일주일에 3일 이상 하루 3시간 넘게 울기 때문이다. 소아과 의사들은 이들이 영아 산통 혹은 배앓이(baby colic)를 한다고 진단한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오래 울면 허기진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에너지를 스무 배나 더 쓴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왜 이런 힘든 행동을 할까? 일부 의사들은 아직 소화기관이 여물지 못해 배 안에 가스가 차서 배앓이를 한다며 젖의 소화를 돕는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 젖을 먹이고 등을 쓸면서 트림을 하도록 하라는 조언도 빼먹지 않는다. 수유하는 산모가 먹는 음식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증세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
생물학자들은 동물의 세계에서 울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새끼들이 울어댄다는 것이다. 침팬지 새끼도, 병아리도 끊임없이 울며 부모에게 자신의 생존을 맡긴다. 이렇듯 소리 언어로서의 울음은 곤경에 처한 자신의 정보를 부모에게 알리는 수단이 된다. 심지어 배앓이를 일종의 속임수로 간주하는 가설도 있다. 건강하고 배가 부른데도 우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더 울어서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영아가 에너지를 투자하는 일이 합당해 보이기도 한다. 생후 석 달이 지나도록 힘들게 우는 아기는 전체 신생아의 0.6%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오래 울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부모 등에 업혀 긴 울음을 그친 셈이다.
이렇게 오래 울면 우는 아기도 힘들지만 달래는 엄마도 피곤할 것이다. 잠자는 시간과 우는 시간이 겹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밤잠을 설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어르느라 줄곧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디에터 월케는 46~87%의 산모가 이런저런 이유로 피로를 겪는다고 보고했다. 그중에서도 배앓이가 단연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우는 아기는 얼른 재워야 한다. 장인어른은 보채는 손녀 손자를 차에 태워 동네를 서너 바퀴 돈 다음 재우곤 했다. 대개 우리는 안거나 처네를 둘러 등에 업어서 애를 어른다.
최근 일본과 유럽 공동 연구팀은 ‘수송 반응에 따라 우는 아이를 재우고 달래는 방법’이라는 논문을 ‘최신 생물학’ 10월호에 실었다. 연구자들은 엄마가 아이를 보듬어 안거나 간이침대에 누이고,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거나 의자에 가만히 앉아 정지한 여러 상황을 실험하고 비교 분석했다. 우선 이들은 머리를 받쳐 아이를 안은 채 급하게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서 방 안을 5분 정도 서서히 걸으면 우는 아이가 스르르 잠에 빠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와 함께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 신호가 줄어든다. 우느라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규칙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 우는 아이의 미주 신경이 활성화되고 차분해졌다.
처음 이 논문을 접했을 때 나는 누구나 아는 일로 웬 호들갑이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실험은 한 단계 더 진척되었다. 잠든 아기를 누일 때 열에 넷은 20초가 지나지 않아 다시 깨어난다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깨어나 다시 우는 애를 달래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잠에서 깨지 않도록 한 가지 방도를 더 실험해보았다.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5~8분 정도 의자에 앉는 시간을 준 것이다. 그다음에는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누이면 된다. 누일 때도 순서가 있다. 머리가 먼저다. 그리고 등과 다리를 서서히 내린 다음 애 몸에서 팔을 빼낸다.
결론은 이렇다. 5분을 천천히 움직여 울다 잠든 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아 8분이 지난 뒤 애를 재운다. 깔끔하다. 하지만 이 논문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빠를 상대로 똑같은 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빠 혹은 부모가 아닌 제3자, 아이 돌보미가 우는 아기를 안아도 저 공식이 고스란히 성립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참 좋겠다. 잠든 아이의 미소는 늘 이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