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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쉬운 해고, NO 식대, 쪼개기 계약···문화재청 노동권은 아직 조선시대?

신라 시대 유적 경북 경주 월성에서 발견된 토우들. 문화재청

신라 시대 유적 경북 경주 월성에서 발견된 토우들. 문화재청

‘신라의 천년수도’ 경북 경주에 있는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5월 발굴 작업을 위한 기간제 임시보조원을 뽑았다. 연구소는 채용 공고상 자격요건으로 ‘고고학과·사학과 등 문화재 학사 재학 이상’을 제시하는 등 나름대로 전문성 있는 인재를 구했다. 그런데 이 임시보조원은 함께 채용된 다른 공무직·기간제 연구원과 달리 식대나 명절휴가비 등을 받지 못한다. 반년을 함께 일할 보조원인데도 연구소가 매일 근로계약이 생성·소멸하는 일용직처럼 ‘일급제’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별도의 임금 책정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아 통상 발굴현장 일용근로자처럼 일급제를 준용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이 설립한 특성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지난해 말 기간제 사무원을 채용하기 위해 채용공고를 올렸다. 학생과에서 입학업무, 홍보, 행사진행 등을 담당할 직원인데, 이 직원의 근무기간은 2022년 1월10일부터 12월31일까지로 돼 있었다. 이 직원은 ‘10일’이 모자라 퇴직금을 받지 못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가기관인 문화재청 소속 공무직·기간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노동권을 침해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명확한 평가 기준 없이 저성과자로 판단해 쉽게 해고할 수 있거나, 대체인력의 고용기간을 보장하지 않고 언제든 계약 해지할 수 있게 하는 등 불합리한 조항·사례가 다수 나왔다. ‘신상 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등 인권침해 소지도 컸다.

‘쉬운 해고’ 우려 큰 조항들···‘쪼개기’ 정황도

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류호정 정의당 의원실은 ‘문화재청 공무직노동자 인사노무관리 실무사례집’과 공무직 인사관리규정, 취업규칙, 소속기관들의 채용공고문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문제 조항들이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평가자의 자의적인 기준으로 저성과자를 판단해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었다. 인사관리규정을 보면 문화재청은 ‘근무성적평가 결과 최근 3년 이내 2회 연속으로 최하위 등급을 받은 경우’에 고용기간 내 계약 해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평가표에 기재된 평가 기준은 “담당업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한다” “맡은 업무 및 조직 발전에 헌신적인 자세를 갖는다” “팀원들과 협조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등 비객관적·비정량적이다. 명확한 근거 없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저성과자를 해고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공무직 등 근로자 근무성적평정표’

문화재청의 ‘공무직 등 근로자 근무성적평정표’

이 같은 ‘쉬운 해고’는 대법원 판례와도 충돌한다. 지난해 대법원은 저성과를 이유로 한 해고의 정당성을 놓고 “인사평가 기준이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해고가 불가피하다 해도 지위와 담당 업무의 내용, 그에 따라 요구되는 성과나 전문성의 정도, 근무성적이나 근무능력이 부진한 정도와 기간, 사용자가 교육과 전환배치 등 개선 기회를 부여했는지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육아휴직 대체인력을 뽑으면서 고용기간을 보장하지 않는 사례도 드러났다. 문화재청 소속기관들이 올해 올린 기간제 노동자(육아휴직 대체) 채용공고들을 보면, “육아휴직 근로자의 상황에 따라 근무기간이 변동할 수 있다”는 취지의 문구가 만안의총관리소, 궁능유적본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 최소 15개의 채용공고에 등장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아예 “육아휴직자 조기복귀 시 계약해지”를 공고에 명시했다. 노동자의 귀책 사유가 없는 조기 계약해지는 부당해고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원래 있던 직원이 조금 일찍 왔다’는 이유로 계약을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마저도 소속 기관별로 달라서 궁능유적본부 종묘관리소·창덕궁관리소 등 일부 기관은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기간을 명확히 못 박거나, 육아휴직자 복직이 늦어지면 연장할 수 있다고 정했다.

2019년 11월28일 오후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5세기 중반부터 후반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63호분 뚜껑돌을 들어 올리고 있다. 권도현 기자

2019년 11월28일 오후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5세기 중반부터 후반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63호분 뚜껑돌을 들어 올리고 있다. 권도현 기자

연차나 주휴수당 지급을 피하기 위한 ‘초단시간 쪼개기’ 계약 정황도 있었다. 올해 초 국립무형유산원은 전시관 기간제 직원을 채용하면서 근무시간을 토·일 하루 7시간(주 14시간)으로 한정했다. 이 전시관은 개관시간이 정확히 7시간으로, 개관 전 준비나 종료 후 관리업무 등을 고려하면 8시간 정도의 노동이 필요하며, 이 전시관의 다른 공무직 주말 출근자들은 하루 8시간을 일한다. 그러나 전시관은 8시간 계약이 충분히 가능한데도 ‘쪼개기 계약’으로 주 15시간 이상 노동자부터 적용되는 연차·주휴수당·퇴직금 등 의무를 피해갔다. 1년 이상 계속 근무하면 발생하는 퇴직금 지급 의무를 피하고자 ‘1월3일~12월31일(국립문화재연구소 채용공고)’ ‘1월10일~12월31일(한국전통문화대학교)’ 등으로 근무기간을 정하는 사례도 있었다.

자소서도 아니고 근로계약서에 ‘학력’을?

근로계약·임금뿐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인권 감수성이 빈약한 정황이 다수 드러났다. 문화재청 공무직·기간제·단시간·촉탁직 등 노동자들의 근로계약서를 보면 인적사항에 ‘학력’을 기재하도록 돼 있다. 채용시험용 이력서나 인사관리카드도 아닌 근로계약서에 학력을 기재하는 것은, 고용노동부 표준근로계약서에도 없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경향신문이 임의로 행정안전부, 국가인권위원회, 기상청, 서울시설공단, 인천관광공사 5곳의 공무직 근로계약서를 확인해본 결과 어떤 곳도 학력 기재란이 없었다. 문화재청의 상급기관인 문체부 공무직도 근로계약서에 학력을 쓰지 않는다.

문화재청의 ‘공무직 근로계약서’. 인적사항에 ‘학력’ 칸이 마련돼 있다.

문화재청의 ‘공무직 근로계약서’. 인적사항에 ‘학력’ 칸이 마련돼 있다.

경위서에 ‘과오 인정’과 ‘반성’을 강요하는 등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문제도 있었다. 문화재청 공무직의 경위서 양식에는 “합당한 처벌을 감수해 차후 본 건을 계기로 과오의 재발이 없을 것임을 서약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대법원은 2014년 이 같은 경위서를 두고 “시말서가 단순히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는데 그치치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죄문 또는 반성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헌법이 보장하는 내심의 윤리적 판단에 대한 강제이자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판례를 남겼다.

불필요한 ‘신상 요구’로 많은 공공기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신원진술서 문제도 여전했다. 부모의 직업부터 본인·배우자의 부동산·동산·채무까지 상세하게 적어 내야 하는 것이다. 2003년 인권위는 교원에게 같은 정보를 물어 관리하던 교육부(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 인권침해라며 권고해 관련 조항을 삭제시킨 바 있다.

류 의원은 “인사관리규정과 채용공고문 주요 내용 중 위헌이거나 위법 또는 부당한 내용은 노동자 권리 침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노동인권 보장의 관점에서 전면 재검토를 통해 잘못되거나 불합리한 내용은 바로잡고, 공공부문에서부터 정부가 모범적 사용자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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