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결핍을 모르는 이들의 결핍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결핍을 모르는 이들의 결핍

입력 2022.10.12 03:00

수정 2022.10.12 03:01

펼치기/접기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늘 에너지 넘치는 오랜 친구가 있다. 연고주의 팽배한 사회에서 별다른 학맥·인맥 없이 오로지 성실성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룬 데다, 과도한 욕망이나 허영도 없고 부모님 봉양과 가족 돌봄도 남다르다. 한길로 달리기보다는 샛길과 골목길에 흥미가 많은 나와는 참 다르지만, 달라서 잘 맞고 배울 점도 많은 사람이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그런 친구가 얼마 전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이야기했다. 즐기는 사교모임에 자주 오는 여성이 있는데, 늘 남들 신세만 지며 먹고 놀다 간다는 것이다. 평소 인색하거나 없는 사람 무시하는 인격이 아니라 처음엔 함께 호응했지만, 듣다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혹시 우울 증세가 없는지 물으니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고 한다. 열심히 나오기는 하지만 그리 즐기는 모습도 아니고 무력해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 여성이 우울증이라면, 공짜로 얻어먹거나 분에 넘치는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해도 전혀 즐겁지 않지만, 그마저 하지 않고 고립되어 있으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극심한 우울증은 슬퍼하거나 분노할 기력조차 없을 만큼 생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 일상적인 삶조차 어려울 수 있다고. 이해하기 힘들고 주위 사람들도 불평하겠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다행히 긴 세월 신뢰가 쌓인 관계인 친구는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정신과 생활이 건강한 사람은 이상적이다. 타인도 자신도 해하지 않고 늘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이들 덕에 세상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니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바르고 올곧게만 살아온 이들은 강자들이 구축한 세계의 질서와 원칙에 취약한 이들이 살아내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등생 부모일수록 자녀의 부족함이나 작은 일탈에도 엄격하듯이, 경험의 한계로 인해 자신과 같지 못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배타성을 보이게 된다.

음지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여성들의 미투가 터져나오던 시기.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자기관리 수준과 원인 제공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는, 평소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잘 보호해 온 씩씩한 여성들이나 강한 권력을 가진 노력형 여성이 많았다.

일베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외로 유복한 집안에서 잘 자란 엘리트들이 많은 이유도 비슷하다.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은, 개인의 우수성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후진국가 국민의 비애, 기회에서 배제된 지역민, 빈민들의 분노, 약자와 소수자들의 두려움, 심신이 취약한 이들의 무기력함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저 게으른 무임승차자들로 판단하고 혐오한다.

별다른 일탈 없는 학생으로 크게 주눅들거나 소외된 적 없이 살아왔던 나의 성장 환경상, 사회에서 비슷한 권력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속에서 좌절과 우울을 극복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런 나의 경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극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이들을 다양한 심리치료와 봉사현장 속에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 역시 타인의 나약함을 질타하고 쉽게 단정짓는 우를 저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토지>의 저자 박경리 선생은 “비애를 모르는 인간은 돼지와 같다”고까지 얘기한 적이 있다.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찬 세상을 도외시하고, 다 죽어도 나만 잘사는 세상을 희망으로 바라보는 것은 망상”이라고도 했다. 개인과 사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가장 심각한 결핍은, 비애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망각한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연민의 결핍”이다. 나치를 비롯해 역사 속 무수한 약자 배제·조롱 행위는 자신의 우수성, 성실성에 대한 과신과 선민의식에서 시작된다. 그늘 없는 우등생들을 유난히 선망하고 지지하는 사회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