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역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입력 2022.10.15 03:00

지난주 토요일에 옛 서울역 역사인 ‘문화역 서울284’ RTO공연장에서 어린이와 책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22 공공디자인 페스티벌과 연결된 프로그램이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큼지막한 유리문으로 노란 햇살이 들어오는 가운데 아침부터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어린이와 어떤 그림책을 읽을 것인가 이야기하는 사이 유리문 밖으로 간간이 기차가 지나갔다. 승객을 태우러 가는 열차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덜컹덜컹 다정한 소리를 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자리는 기차역의 대합실이었겠고 누구는 여기서 큰 포부를 안고 책가방을 든 채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더 올라가면 어떤 사람들이 서 있었을까. 총칼과 무기가 있는 난폭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시절을 상상하자 기차 바퀴의 평화로운 움직임이 문득 거칠게 느껴졌다.

지금은 기차역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곳은 1922년 착공되고 1925년 준공된 오래된 건물이다. 당시에는 경성역사로 불렸고 사이토 마코토의 글씨를 받아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정초석이 설치되어 있다. 지하 1층·지상 2층의 화강석과 붉은 벽돌이 혼합된 건물로, 2003년부터는 역무 기능을 새로 건설된 역사로 모두 옮기고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도는 일제강점기에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일본은 우리 국토를 침략해 짓밟은 뒤 철로를 놓고 이 역사를 지어 중국 대륙으로 가는 전쟁의 발판으로 삼았다. 역사 건물은 주춧돌이 놓일 때부터 그 역사의 비명을 고스란히 듣고 지켜본 셈이다. 건축물에 마음이 있다면 혹독한 폭압을 목격하며 수없이 몸서리치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침략을 증언하는 핵심적 옛 건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자리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신청사 자리로는 본래 동숭동이나 지금의 서울시청 터가 거론되었지만 초대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사코 경복궁을 가로막는 자리에 세워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경복궁의 의미를 모욕, 훼손하고 일본이 한반도의 통치자라는 의식을 유포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도 동쪽으로 이전하였다. 이 모든 것을 밀어낸 것은 무려 70년이나 지난 뒤였다.

1995년 8월15일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가 시작된 날이다. 광복 50주년 경축식과 함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이 건물의 완전 철거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완전철거론’과 ‘이전복원론’, ‘현상보존론’이 오가던 끝에 건물을 깨끗이 없애게 되었다. 내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각별한 기억이 있다. 그 무렵 학생이던 나는 그 건물의 최후를 보고 싶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마지막 개방일 폐관시간 즈음에 박물관에 입장했다. 거대한 철불이 전시되어 있던 지하전시실에서 문 닫히기 전의 30분 정도를 보냈다. 경비를 서던 분과 함께 거의 마지막 관람객이 되어 박물관 문을 밀고 나서는데 건물의 낡은 돌쩌귀가 크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과거의 일을 다 보았다고 증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어린이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종 다양성을 생각하면서 사라져버린 독도강치를 그린 그림책을 읽을 수도 있겠고 바다를 떠도는 플라스틱 섬을 그림책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자리가 일제강점기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 민족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의 장소를 철거했다고 해서 그 기억마저 철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지워도 괜찮다는 말이 들린다. 우리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옛 서울역 역사가 남아있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