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막아내야 하는 것은 여성가족부 폐지로 대표되는,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책 후퇴입니다. 민주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반대 입장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저지해야 합니다. 당대표가 직접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남은주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지난 15일 전국 195개 여성·시민·노동·사회단체 주최로 열린 ‘여성가족부 폐지안 규탄 전국 집중 집회’. 타깃은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었지만, 더불어민주당도 화살을 비켜가진 못했다. 정부가 지난 6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표한 뒤, 민주당 대응이 미지근한 탓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첫 ‘공식’ 입장이 나온 건 11일이다. 김성환 정책위의장은 “여가부 폐지에 대해 대선 때부터 일관되게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당론으로 정한 것이냐’는 질문엔 “정책위의장이 공식적으로 하는 이야기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쟁점 법안이 생기면 의원총회를 열어 당론을 채택해온 관행과 달랐다. 민주당 지도부는 여가부 폐지 문제를 공개 거론하는 걸 회피해왔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 7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조직 개편의 우선순위가 잘못됐다”고 한 게 상징적이다. 내부 이야기를 종합하면,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지만 당대표·원내대표가 직접 거론하면 ‘정쟁’화하고 윤석열 정부의 무능 등 다른 쟁점을 가릴 것으로 우려한다고 한다.
이 대표는 최근 한·미·일 군사훈련과 관련해 친일 이슈를 부각시켰다. 정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반면 여가부 문제에는 굳게 입을 닫았다. 2003년 유시민씨가 개혁당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두고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한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0년이 흘러도 리버럴진영의 젠더 인식은 제자리인가.
아니면, 169석의 힘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건가. 169석은 탄핵 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과반’ 맞다. 그런데 민주당이 과반 의석으로 무엇을 해냈나.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배소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을 입법했나? 차별금지법을 제정했나?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를 폐지했나?
이 또한 아니라면, 여가부 문제를 매개로 뭔가 ‘거래’하려 하나. 타협과 협상은 정치의 본령이다. ‘기브앤드테이크’도 가능하다. 다만 거래가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성평등은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는 보편적 가치다. 여가부 폐지는 작은 부처 하나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더 많은 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확장해온 민주주의 역사의 훼손”(한국여성학회 입장문)이다.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윤석열 정부의 여가부 폐지 추진을 보도하며 지면기사 제목을 “반페미니스트용 선물”로 달았다. 적확하다. 여가부 폐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취하고 문화강국 반열에 오른 한국에서 ‘안티 페미니스트의 승리’를 국가가 공식 승인하는 선언이다.
이 대표는 대선 과정에서 이른바 ‘이대남’으로 표상되는 허상을 좇아 갈지자 행보를 했다. 막판에야 n번방 실체를 파헤친 활동가 박지현씨를 영입하고 여성청년에게 표를 호소했다. 출구조사 결과 60대 이상을 제외한 모든 연령대 여성이 이재명 당시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여성의 이 후보 지지율은 58%에 이르렀다. 0.73%포인트 격차는 그렇게 나왔다. 여성청년은 ‘이재명이나 민주당이 좋아서’ 찍었던 게 아니다. 여가부 폐지·성폭력처벌법 무고죄 신설 등 ‘여성을 지우려는’ 윤석열 후보의 공약이 ‘두려워’ 투표한 것이다. 여가부 지키기는 정치적 신의의 문제다.
현실정치에선 표 계산도 필요하다. 지난 대선 투표율은 여성 77.5%, 남성 76.8%였다. 50대 이하 전 연령층에서 여성 투표율이 남성을 앞섰다. 특히 25~29세 여성은 남성보다 8.9%포인트, 30~34세 여성은 남성보다 5.4%포인트 높았다. 30~34세 여성은 2017년 대선(당시 25~29세) 때도 또래 남성을 7.9%포인트 앞섰다. 이들 세대의 정치적 각성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좌다. 한국갤럽이 지난 14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층 가운데 64%가 여가부 폐지에 반대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임을 자임한다. 여성부는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했다. 오늘날의 여가부는 노무현 정부 때 탄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자 임기를 한 달 앞둔 노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연다. “여성부가 왜 생겼고 왜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됐는지, 그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봤나. 여성부에선 귀한 자식 대접을 받던 업무가 복지부로 가면 서자 취급받지 않겠느냐.” 여성부는 존속된다.
이 대표가 경기지사이던 지난해 6월 인터뷰를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강점’을 물었다. “용기, 추진력”이라면서 부연했다.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은 첫째, 뚜렷한 철학과 가치가 있어야 되고요. 둘째가 용기와 결단력입니다. 많은 정치인은 반발과 대립이 심하면 회피합니다. 저는 회피하지 않죠.”
그때의 이재명과 지금의 이재명은 다른 사람인가. 이 대표는 여가부의 존속을 넘어 이를 성평등증진부 형태로 확대·강화하는 당론 채택에 앞장서야 한다. 침묵하면 이 대표도, 민주당도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