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설계는 노인을 배제한다. 산업화 이후 자동차가 중심이 된 공간 구성은 사람이 걷는 길마저 속도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탓이다. 실제로 행인의 걷는 속도가 1990년대 이후 20여년 만에 평균 10% 이상 빨라졌다는 연구도 있다.
사회·경제 활동이 왕성한 사람을 ‘시민’으로 상정한 도시는 그래서 고령화에 취약하다. 인구의 3분의 1이 노인인 시대를 앞두고 세계보건기구(WHO)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고령친화도시’ 설계를 시작했다. 이 도시는 노인이 독립적이고 주체인 삶을 사는 공간으로 정의된다.
노인을 위한 공간이란 무엇이 다를까. 서울연구원이 지난 2019년 서울 광진구 자양4동과 강동구 천호3동에 사는 만 65세 이상 거주자의 동선을 분석해 <노인을 위한 동네>를 발간했다. 연구를 보면 고령자들은 보통 집에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로당과 식당, 미용실, 슈퍼마켓, 이웃의 집 등을 가장 자주 방문했다. 재래시장, 복지관, 공원 등 가끔 들려 시간을 보내는 곳까지는 필요하면 15분 정도는 걸었다.
이들이 다니는 길은 가게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설이 밀집해 있으며 차가 다른 길보다 덜 다닌다. 또 새로 난 길보다는 지역의 오랜 옛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다면 ‘노인이 걸어서 15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범위에 생활 필수 기능을 모으고, 볼거리는 많되 차는 다니지 않는 곳에 통행로를 조성한 동네’가 고령층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 결론이 흥미로운 것은 최근 세계 주요 도시들이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붕괴된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추진중인 대안적인 공간 설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실험이 시작된 ‘15분 도시’는 생활 공간을 15분 이내 거리에 배치해 탄소배출을 줄이자는 설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도 그렇다. 보행자 중심의 공간 재편이 핵심인 도시계획으로, ‘블록’으로 설정한 구획 안에는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늘려 이웃 간 접점을 넓히는 게 목적이다. 속도는 느리며 변화에 적응이 쉽지 않은 노인에게 최적화된 구상들이다.
그동안의 대도시는 민간 수익과 연계해 공간을 개발하는 데 익숙했다. 김동완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행위에 맞는 기능별 공간을 구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도시에서는 경제력을 상실한 노인들은 자리를 잃고 특히 더 떠밀린다”고 설명했다.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할 공간이 카페, 식당 뿐인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국의 도시는 카페와 식당이 ‘유사 공공공간’의 역할을 맡고 있어요. 노래방, PC방 등 돈으로 사야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지배적이죠. 소득이 없거나 불안정한 노인 세대가 갈 곳이 사라져 ‘퇴적공간’이 생겨났죠. 복지 시설 역시 자식, 손주들과 방문해도 어색하지 않은 공적 공간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1968년에 <도시에 대한 권한>을 통해 시민들이 각자의 경험과 관계를 쌓는 ‘삶의 공간’을 누릴 동등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 없이 열린 공간이 일상에 더 많아질 때 가능한 일이다. <노인을 위한 동네>에서 서울연구원은 “고령층에게 편리한 공간은 노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고 제언한다.
다양한 속도로 살아가는 시민들을 포용하려면 효율과 수익이 아닌 공공성을 우선에 둔 공간이 더 요구되는 것이다.
박인권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도시는 경제·산업적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며 “건강한 성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관점에서 시스템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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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김보미(전국사회부) 배문규·김한솔·김지혜(스포트라이트부)
사진·동영상 | 강윤중·성동훈(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인터랙티브 콘텐츠 | 박채움·이수민(다이브팀) 현재호(디자인팀)
편집 | 채희현·임지영(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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