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 A씨는 2005년 경기도의 한 내과의원에서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았다. 신장 165㎝에 52㎏으로 결코 다이어트가 필요한 몸매가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에 호기심이 생겼고, 조금 더 날씬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거니까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후 A씨는 2020년까지 15년 동안 약물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식 처방된 다이어트약, 진통제, 항우울제 중 일부 약물에도 중독 성분이 들어 있다. 오·남용을 엄격히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라며 의심하지 않는다. 몇몇 병의원들은 돈을 벌 목적으로 환자의 투약 주기를 확인하지 않고 처방전을 남발한다.
중독을 일으키는 다이어트 약물은 펜디메트라진 등 향정신성 성분을 포함한다. 각성 작용으로 식욕을 억제하는 원리다. 이런 이유로 다이어트약 중독이 필로폰 중독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A씨도 어느 약을 복용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활기가 넘치고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체중은 47㎏까지 내려갔다.
목표를 달성하고 약을 멈췄다. 그런데 몸이 축 처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을 느꼈다. “혹시 약 때문인가 싶어서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 기분이 괜찮은 거예요.” 하루 세 번, 한 알씩 먹던 약을 조금씩 늘렸다. 어느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그제야 약 성분을 찾아보니 마약 성분이라고 나오더라고요.” 약을 안 먹으니 A씨는 아무 의욕도 느낄 수 없었다. 맥주 세 잔을 마신 어느 날 A씨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맸다. 전형적인 향정신성의약품의 부작용이다.
30대 여성 B씨도 취업 면접을 앞두고 단기간에 살을 빼기 위해 강원도의 한 피부과에서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았다. B씨가 복용한 약에는 간질약·변비약·항우울제가 들어 있었다. 약을 먹으면 밥 생각이 사라졌다. 식사량이 줄어드니 화장실을 가지 않게 됐다. 대신 변비약이 설사를 심하게 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이게 정상인가 싶었지만 살이 안 찌니까 오히려 안심이 됐어요.” B씨는 2주 단위로 약을 처방받았다. 한번 갈 때마다 10만원 이상 지불했다. 가격이 비싸도 “쉽게 빠지니까 혹했다”고 했다. B씨가 약을 처방받은 의원 이름을 포털에 검색하니 최근까지도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글이 올라온 것을 볼 수 있었다.
펜타닐 진통제는 청소년들을 심각한 약물중독에 노출시킨 주범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어머니를 죽게 한 약물이 펜타닐이다. 한은경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마퇴본) 전북지부 상담실장은 “어렸을 때 큰 수술을 했던 한 중학생이 있었는데 펜타닐 진통제 치료를 받다가 중독됐다”며 “생리통이 있을 때마다 약을 처방받아서 하루 5회 이상 먹었고 나중에 약을 복용하다가 의식을 잃어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례”라고 했다. 재활치료 중인 20대 여성 C씨도 허리 디스크를 이유로 펜타닐 패치를 처방받았다가 중독에 빠졌다.
지난해 5월에는 경남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가 펜타닐 패치를 다량으로 처방받아 투약·판매한 10대 42명을 한꺼번에 검거한 일도 있었다. 펜타닐은 헤로인이나 모르핀보다 진통 작용이 훨씬 뛰어난 약물로 중독성도 헤로인보다 높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에 따르면 미국에서 펜타닐 등 약물을 과다복용해 사망하는 사람이 2020년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섰다.
병의원 과다처방 문제는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지만 이를 규제할 시스템은 충분치 않다. A씨는 자신이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은 병원에 “10분에 10명 정도는 왔다갔다 했다. 늘 줄이 서 있었다”며 “대부분이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김인영 마퇴본 영남권 중독재활센터 대리는 “환자들은 처방을 잘해주는 병원을 이미 알음알음 공유하고 있고 명의를 도용해 처방받다가 적발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서울 강남 지역의 한 경찰관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겉보기에는 마약 중독자와 별반 차이가 없고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며 “하지만 의사가 과잉처방을 해도, 과다복용을 해도 입건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박영덕 마퇴본 재활지도실장은 20일 “국가가 법으로 마약성 진통제나 약물들을 철저히 검증한 후에 처방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