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가의 광기가 낳은 광인…그 주위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작은 아씨들>의 초·중반까지만 해도 오인주(김고은·오른쪽 작은 사진 가운데), 오인경(남지현·작은 사진 맨 오른쪽), 오인혜(박지후) 자매가 맞서야 하는 거대한 음모와 악행의 배후는 박재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극의 중심은 원상아(엄지원)라는 ‘미친 여자’의 욕망으로 옮겨갔다. tvN 제공
드라마 <작은 아씨들>(tvN, 2022)이 끝났다. <작은 아씨들>은 방송 전부터 화려한 캐스팅과 제작진의 라인업으로 화제를 뿌리고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친절한 금자씨>부터 <헤어질 결심>까지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의 두 번째 드라마이자, <왕이 된 남자> <빈센조>를 연출한 김희원 감독은 물론 <아가씨> <헤어질 결심>을 만들어낸 류성희 미술감독까지, 일명 ‘어벤져스’였다. 캐스팅은 또 어떤가. 제목이 의미하는 ‘작은 아씨들’의 세 자매 오인주, 오인경, 오인혜는 각각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라는 배우를 입고 생생하게 살아났다. 원상아(엄지원), 오혜석(김미숙), 최도일(위하준), 박재상(엄기준) 등 이야기를 끌어가는 다른 인물들의 존재감 역시 활을 잔뜩 당긴 시위처럼 팽팽했다. 풍성한 텍스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짠 직물의 총합 같아서, 어떤 실마리를 잡고 어느 방향으로 해석을 풀어가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에 도달하게 된다. <작은 아씨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또한 쟁쟁하다. 한국 현대사, 국가폭력, 돈, 여성 서사, 연대, 사랑…. 어떤 것을 고르든 논의와 감상의 타래는 사부작사부작 풀어진다. 여기서는 ‘미친 드라마’의 최종 빌런으로 밝혀진 원상아, 그 ‘미친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아버지의 악행을 폭로하려다 감금 당한 엄마를 실수로 죽여…
그 트라우마 속에서 결국 미쳐버린 원상아
가족들의 기괴한 탐욕과 질서에 배제되어
‘가정’이라는 영역에 갇힌 채 괴물이 돼
악에 맞선 인주·인경·인혜 세 자매도 ‘범상치 않은 욕망’과
‘광기어린 기질’이 싸울 힘과 용기를 줘
미치지 않은 것만이 선하고 좋은가…누군가를 ‘미쳤다’고 낙인 찍고
배제할 때 광기 바깥에 있는 것은 무결한가
<작은 아씨들>의 초~중반까지만 해도, 세 자매가 맞서야 하는 거대한 음모와 악행의 배후는 박재상처럼 보였다. 박재상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 출신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원기선 장군의 딸과 결혼하며 원령가(家)의 후계자가 되었다. 경리로 일하는 첫째 오인주는 유일한 친구였던 진화영(추자현)이 회사 비자금 700억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자살하자, 이 죽음이 자살이 아니며 박재상과 관련 있다고 여긴다. 기자인 둘째 오인경은 박재상이 여러 불법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을 좇는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셋째 오인혜는 박재상의 딸에게 그림을 대신 그려주고,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원령가와 얽힌다. 세 자매는 돈과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 맞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한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자상한 박재상은 쇼윈도 부부를 연기하며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악역…으로 보였으나…, 이러한 박재상의 캐릭터조차 원상아의 ‘설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원상아는 자신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배우 삼아, 연극을 연출하고 그 자신도 배우로 출연하는 게임을 즐겼던 것이다. 지금까지 오인주가 겪었던 모든 현실이 원상아의 무대 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경악은 <트루먼쇼>에서 느끼는 기괴함과 닮았다.
여기서부터 <작은 아씨들>의 장르는 기존의 장르와 다소 다른 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작은 아씨들>은 파병, 독재, 철거와 재개발, 부동산 투기 등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빨아먹고 축적한 부와 권력을 정의로운 주인공이 응징하거나 심판하는 서사가 아니다. 이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첨예한 비판 의식이자 현실 인식이되, 메인 플롯은 아니다. 중심은 이제 원상아라는 ‘미친 여자’의 욕망으로 옮겨간다. 원상아는 미쳤다. 드라마를 본 이들이 모두 동의할 것이다. 자신의 ‘재미’와 ‘흥미’를 위해 사람을 배역처럼 갖다 쓰고, 뜻대로 안 되면 죽여버리는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상아는 묻는다. 왜 장군의 딸인 자신이 아니라 사위이자 운전기사의 아들인 박재상을 후계자로 택했냐고.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여자라서?” 원기선 장군의 하수인이었던 장사평(장광)은 대답한다. “네가 미친년이기 때문이야.” 그 순간 무언가 뒤틀린다. ‘미친년’. ‘미친놈’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또 널리 쓰이는 이 표현. 원상아는 정말 ‘미친년’일까? 아니, ‘미쳤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아니.
원상아‘만’ 미친 것일까?
원상아에게는 원래 오빠 원상우(이민우)가 있었다. 아들이기에 원령가의 후계자였던 원상우는 아버지와 뜻을 달리하고 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려다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원령가가 폭력적인 아버지-질서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는 방식이 바로 ‘미쳤다’라는 낙인이다. 비이성적이고, 통제와 교정이 필요한, 특정 가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하는 존재인 ‘광인’. 그러나 사람들은 원상우가 진짜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사평도 이 ‘적장자’가 ‘고작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원상아를 배신한다. 그리고 원상아가 ‘희생을 할 줄 모르는, 자기밖에 모르는 미친년’이라서 후계자에서 탈락했다고 말한다. 인과관계가 바뀌었다. 미쳤기 때문에 후계자에서 탈락한 것이 아니라, 후계자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원상아를 미친년으로 만든 것이다. 원상아가 아들이었다면, 혹은 딸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계관이었다면 원상아의 탐욕은 박재상의 꿈과 야망만큼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연극 놀이로 사람을 조종하고 죽이는 대신, 원기선과 박재상처럼 부와 권력의 축적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사건을 조작했을 것이다. 국가폭력과 독재개발을 타고 살인과 비리를 일삼으며 재산을 불린 사람들은 현명한 투자자이고, 아버지 질서에서 배제되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갇혀버린 원상아만 미친년일까?
필리스 체슬러가 쓴 <여성과 광기>(임옥희 역, 위고, 2021)는 1972년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여성의 정신 건강이라는 주제에 파문을 일으킨 책이다. 왜 너무 많은 여자들이 미쳤다는 진단을 받는가?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정신의학은 누구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가? 체슬러는 가부장제의 파수꾼으로서의 정신의학이 어떻게 광기를 이용해 여성을 통제하는지 그 배경을 파헤친다. “여성은 자기희생이라는 십자가형에 처해 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명확히 문화적인 탁월함과 개성이 부정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광기는 그런 방식으로 또 다른 형태의 자기희생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와 같은 광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이 성적·문화적으로 거세되는 강렬한 경험이며 힘을 향한 암울한 탐색이다. 그런 탐색은 종종 ‘망상’을 수반하거나, 물리적인 공격성, 광휘, 성욕, 정서적인 특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모든 특질은 여성 지배적 문화에서라면 보다 잘 수용될 수 있을 것들이다.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그와 같은 특질들이 가부장제의 정신병원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148쪽) 한편 원상아는 원기선 장군의 악행을 폭로하려 했던 엄마가 2000일 넘게 감금당하고, 그런 엄마를 자신의 실수로 죽게 한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원상아는 엄마가 갇혔던 방을 ‘닫힌 방’이라고 부르며, 그 공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자신의 연극 무대로 재현한다. 미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여자를 던져놓고, 마침내 미쳐버리면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제하고 억압하는 아이러니. 원상아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미치지 않은 것’만이 선하고 좋은가?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사리 분별이나 이해타산이 확실한? 글쎄, 원상아에 맞서는 ‘작은 아씨들’도 어딘가 조금씩은 ‘돌아 있다’. 700억을 향한 욕망보다 피를 나눈 가족도 아닌 화영 언니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큰 인주의 눈도 어딘가 핀트가 나가 있다. 인경은 알코올 중독자에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느라 주변에 ‘민폐’를 끼쳐 시청자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남지현은 인터뷰에서 인경의 캐릭터가 호불호가 갈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인혜는 그림을 대신 그려주고도 치욕감을 느끼는 대신, 적극적으로 재능을 거래하고자 한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고, 여자로서 딸로서 ‘소녀’로서 으레 받기 마련인 관습적 기대를 배반한다. 어떨 때는 부담스럽고, 어떨 때는 사랑스럽지 않다. ‘과잉’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런데, 그 범상치 않은 욕망이, ‘광기’로마저 보이는 기질이 역설적으로 자매의 힘이자 용기가 된다.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따지던 냉철한 남자 최도일이 오인주 편에 붙자, 고수임(박보경)은 말한다. “설마, 썸 타는 여자를 위해서 700억을 날리는 남자는 없겠죠?” 원상아는 소리 지른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하지만 그 ‘미친 소리’가,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 결국 최도일과 오인주를 지켜주었다. 비바, 광기! 미친 사랑이 미친 권력을 이기는 미친 드라마 <작은 아씨들>. 드라마의 여운을 곱씹으며 되물을 때이다. 미쳤다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뜻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정상적인지. 광기가 어떤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구성되고 정의되는지, 누군가를, 무언가를 ‘미쳤다’고 낙인찍고 배제할 때 광기 바깥에 있는 것은 무결한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