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경쟁하며 살아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시부터 취업, 그리고 이후 부의 축적과 그에 따른 지식 계급과 노동 계급으로서의 신분 상승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부의 세습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린아이에게 미리 상속해야 할 만큼 부유한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중·고등학교의 일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드러난다. 매일 아침 다려진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학교에 갈 수 있는 것 역시 그렇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부장으로 일하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교복은 보살핌의 상징이다. 교복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데도 누군가의 대리노동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겨진 교복을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와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들은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공부만 할 수 있는 학생과 공부도 해야 하는 학생이 내는 결과야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경쟁을 보조할 수 있는 그 환경이 한 개인과 가문의 위계를 만들어 낸다.
능력주의와 공정주의는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다리를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야 한다. 그 경쟁에서 사람의 능력과 공정이라는 것은 최고의 가치이자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보루로 인식된다. 그러한 경쟁의 심화 속에서 우리가 다정함이라는 감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타인은 내가 싸워나가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경쟁해 나가야 할 존재라고 할 때, 적어도 그 경쟁의 방식은 보다 다정할 필요가 있다. 최근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를 쓴 장석준 교수는, 개인에게는 소유인과 지능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역량과 덕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가진 존재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을 향한 우정과 애정을 유지하며 경쟁할 수 있는 존재다. 이른바 다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일부러 져 준다거나 누군가가 페널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과정은 아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경쟁의 승리나 패배가 한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는 경쟁은 반드시 다를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승자는 겸손해야 하고 패자는 당당해야 한다.
사람의 잘됨이라는 것은 그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거의 없다. 무수한 운과 조력과 자신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한 사람의 잘됨은 완성된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느 순간마다 개입한 누군가들이 없었다면, 온전한 나의 잘됨을 바라며 후의를 베푼, 그리고 내가 깨끗한 옷을 입고 바깥에 나갈 수 있게 하고 글을 쓸 수 있게 아이들을 돌봐준 그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계속 뒷걸음치고 있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잘된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운이 좋았으며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이 아주 많았노라고. 사람의 가치란 결국 이러한 태도에서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무엇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노력에 기여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며, 그 기회를 부여받은 것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나 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는 사람의 능력보다도 그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능력이 좋은 사람을 찾기는 쉬우나 태도가 다정한 사람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신의 잘됨 앞에서 겸손한 사람, 그리고 자신이 최선을 다한 패배 앞에서 당당한 사람. 그러한 이들이 서로 연결되고 어느 합의에 이를 때, 다정한 경쟁이란 낭만이 아닌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한 교육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되었다. 적어도 함께 오르던 사다리에서 누군가 떨어지려 하면 우선 손이라도 잡아주어야 할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