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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한가?

수도권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시민들은 이제 ‘장차연’(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라는 단체를 모를 수 없다. 지하철 승강장과 차량 안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 때문에’ 운행이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을 듣기 때문이다. 폭설, 화재, 폭우와 관련한 안내는 빼먹어도 이것만은 결방이 없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나에게는 이 방송을 들을 때마다 자동 재생되는 기억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사회와 건강 문제를 토론하는 의대 수업시간이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를 시청한 후 한 학생이 질문했다.

“근데 이 분들은 왜 꼭 버스를 타려고 할까요?” 매일 본인 승용차로 등교하는 이 학생은 저들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면 되지, 왜 꼭 사람 많은 버스를 고집해서 저렇게 고생하고 욕을 먹을까?

이럴 때면 흔히 공감 부족을 지적한다. 장애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봐라, 당신이 내일 당장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리 속 편한 소리를 할 수 있냐는 식이다.

문제는 공감(보다 정확하게는 감정이입)의 방향이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를 보면서,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보다는 회사에 지각해서 난처해진 신입사원에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행기 탑승 시간을 놓칠까 초조해하는 여행객에게 이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감들이 모이면 장애인 시위를 압박하는 힘이 된다.

젠더 폭력이나 디지털성범죄를 다루는 언론보도는 어떤가. 피해 여성이 ‘만나주지 않아서, 헤어지자고 해서, 밥을 차려주지 않아서, 잔소리를 해서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고, ‘코로나 업무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손이 저절로 움직여 불법촬영을 한다. 가해자는‘평소에 성실하고 점잖은 이웃’이거나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한결같이 가해 남성과 공감하고, 가해 남성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목소리들이다. 이것도 분명히 공감은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은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고 솜방망이 처벌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다.

내부 공동체를 향한 ‘배타적’ 공감은 어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을 발표했던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종부세 위헌소송 대리를 맡았다는 사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근무하는 로펌 내부와 주변에 종부세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서, 서로 대화하다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시작된 일이라고 밝혔다. 전체 주택 중에서 종부세 부과 대상은 채 2%도 안 된다는데 내 주변에 온통 종부세 걱정하는 사람들뿐이라면, 사회 엘리트로서 자산 분포의 불평등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법도 하지만, 이분들 마음속 공감의 불빛은 서로를 따뜻하게 비출 뿐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생존은 협력에 달려 있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들 중 하나가 공감이었다고 한다. 문자와 인쇄술 덕분에 공감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시와 소설, 에세이를 통해, 타인의 삶과 감정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상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공감의 시공간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제 우크라이나와 이란의 시민들과 공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보다 가까운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더 쉽게 공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즉각적, 지엽적 공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때, 보편적 인권과 사회 정의는 위협받을 수 있다. 누구에게 공감하고, 무엇을 공감하는지에 따라 공감 그 자체는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자산가와 엘리트 계층의 이익을 수호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공감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의 경계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더 너른 공감, 도덕적 판단이 뒷받침되는 조금은 ‘느리고 냉정한’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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