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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

입력 2023.01.20 03:00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

농사가 안된 해는

팔 게 없어 걱정이더니

좀 많은 해는

다 못 팔아 걱정이다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

농약과 화학비료 안 쓰니

흙이 살아나 살맛 나는데

허리 휘어져라 일할수록

손마디만 굵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

괭이와 호미 한 자루에

생존을 맡기고

풀과 흙에게

세금 내며 만족하는 일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그저

새벽녘 잠을 깨우는

온갖 새소리에 귀를 씻는 일이다

-시, ‘산골농부’, 최정, 시집 <푸른 돌밭>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등유 경유 식용유 밀가루 등 세상천지 모두 올랐는데 쌀값만 떨어졌다. 밥 한 공기 가격이 300원이었는데 최근엔 206원이란다. 소비자들은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농민들은 그 차이가 크단다. 동네에서 직접 지은 쌀 사먹은 지 8년째인데, 대부분 20㎏ 한 포대에 4만원이었다. 8년 동안 그대로다. 이종관씨는 쌀을 실어다 주며 “값이 아직 안 정해졌으니 나중에 계산하자” 했다. 처음엔 못 알아들었다. 설명을 들으니 노무현 정부 시절 쌀값 정상화를 위해 도입한 ‘공공비축제’ 때문이란다. 80㎏ 한가마 17만5000원에서 시장가가 더 내려가면 그걸 사들여 내려간 만큼 농민에게 보상해주어 쌀의 안정성을 높인다는 취지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쌀 시장가가 13만원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단다. 그리고 2022년 여름부터 다시 쌀값이 떨어지고 있단다. 사실 농사란 게 매년 생산량 비슷하니 때맞춰 사서 비축해뒀으면 별일이 없을 텐데, 이미 시장에서 다 떨어지고 나서 격리하려니 시장가도 못 잡고 정부도 손해란다. 오죽 분통이 터지면 수확기를 앞둔 논을 트랙터로 밀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겠는가.

새해 초부터 윤석열 정부는 쌀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무제한 수매’ 운운하며 거부권 입장을 밝혔다. 국가가 쌀을 ‘무조건’ ‘무제한’ 사주어 재정을 파탄내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쌀이 3%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쌀 가격이 5% 이상 하락’한 경우에만 ‘수요량을 초과한 생산량’을 정부가 사겠다는 최소한의 안전조치다. 쌀값 폭락을 벼농사를 많이 지은 농민과 쌀을 많이 안 먹은 국민에게 돌리더니, 미분양 아파트는 사주겠단다. 건설사 경기 좀 나쁘다고 돈 풀고 세제 혜택 다 주면서 농민에게는 왜 그렇게 인색한가. 그런 이중잣대의 본질은 농민과 농업의 농촌의 홀대이자 생산자와 약자 무시다. 지난 20년간 농가 부채가 81% 상승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제 농가소득은 마이너스나 다름없다고 한다. 우리 동네만 봐도 농사를 꽤 많이 짓는데도 날일 다니는 분들이 많다. 나는 상상해본다. 지금 농사짓는 어른들이 다 가고 난 20년 후쯤을. 그때는 누가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을 지키고 있을지. “자동차 선박 휴대폰 판 돈으로 쌀 사먹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할지 모르지만, 쌀은 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수입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만 해도 베트남 등지에서는 쌀을 수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식량 안보라는 것이다.

눈 쌓인 벌판이 펼쳐져 있다. 평평하게 쌓인 곳은 논이고 구부렁구부렁 요철이 반복되는 곳은 밭이다. 세상천지가 눈 맞으며 쉬고 있다. 저 눈 속에서도 부직포 한 장 덮고 마늘은 촉을 올리며 제 목숨을 키워내고 있겠다. 눈이 녹으면 밭과 논이 눈을 뜰 게다. 그리고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던 흙 속에서 자던 씨앗들이 껍질 깨고 올라올 게다. 설이 낼모레다. 겨울은 견디는 시간이지만 안으로 깊어지고 푸르게 튀어나올 봄날을 꿈꾸기에도 좋다. 뭍 생명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공기나 물이나 거저 주어진 것, 흔해서 천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존중받는 세계에 대한 꿈이자, 밥하고 청소하고 농사짓고 제품 만드는 손마디 굵은 손들이 대접받는 세상에 대한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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