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외국어 공부 루틴을 정비했다. 수험 영어에만 집착하다가, 근 이삼 년 다섯 개 언어를 둘러보며 학습 영역을 넓히고 나니 영어의 무게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러면서 원어민(백인-미국인)에게 ‘책잡히지 않는’ 발음과 표현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진짜로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당연한 것들을 낯설게 보며 말하는 연습을 한다.
한편 국제 비교 연구를 읽는 데도 재미를 붙였는데, 차이는 제대로 된 비교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전제 자체를 깨려면 다른 사회들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 이곳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금 내게 외국인에게 한국을 소개하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경부고속도로엔 위령탑이 있어. 이 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싼 비용을 들여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된 도로야. 도로를 만들다가 77명이 죽었어. 우리 엄마는 아직도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이 많이 죽는 걸 ‘사고’라고 생각해. 나는 어쩌다 그런 게 ‘사회적 참사’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부터 온 힘을 다해 엄마와 싸웠어. 엄마는 중졸이라 무식해서 뭘 모른다고 화를 냈어.
한국 사회에서 자식은 부모와 한 인간이라고 여겨져.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하는 걸 ‘동반 자살’이라고 말해 왔어. 엄마는 나를 자기가 만든 세계에 가둬두려 했어. 그러니 나는 그 세계를 고치고 싶었던 거야. 당연히 엄마는 고쳐지지 않았어. 나는 엄마와 실컷 싸우고 물어뜯고 밀어내고 겨우 떨어져 나왔어. 한 십년 떨어져 살고 나서야 엄마와 나는 같은 사회 다른 시간을 살아 온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진 1970년 엄마는 열한 살이었어. 내가 열한 살이 되기까지를 떠올려 보면, 성수대교가 무너져 33명이 죽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2명이 죽고, 그 이듬해엔 씨랜드가 불타 24명이 죽었어. 그런데 나는 씨랜드 참사를 비판하는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자랐어. 엄마가 어릴 때는 독재 정부가 노래 가사를 검열했어. 한국은 이런 곳이야. 모든 것이 정말로 빨리 변해온 곳.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의 위령탑은 한국이 ‘빨리’ 가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뒤로하고 달려 왔는지,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당연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야.
이렇게 머릿속에서 중얼중얼하다 보면 최근의 사건들까지 생각이 닿게 된다. 예를 들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시위 현장을 보고 아무래도 인권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린다. 국제 사회에서 뭔가를 그냥 버려뒀을 때 큰일이 났단 집단 학습을 통해서 인권 개념이 만들어져 온 역사를 탐구하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나서야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위령탑을 낯설게 보면서부터 내 앞에 끊어진 도로가, 움푹 팬 맨홀 구덩이가, 시멘트를 막 발라 생긴 노면 단차가, 한강 내려가는 길 매번 고장난 엘리베이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뒤로하면 안 되는 걸 뒤로해 온 사회의 상징들. ‘당연한 것’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며 힘을 다해 만들어 온 불만은 정당하기에 그들의 편에 선다.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