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두박질치는 ‘삶의 질’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골목에서 31일 한 주민이 보일러 연통을 바라보고 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휴대폰·교통비·식비 줄였는데
뭘 더 포기하고 살라는 말이냐”
31일 오전 8시, 오토바이로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 이모씨(27)의 귀와 볼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서울 성북구 단독주택에서 선릉역에 있는 직장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0분. 영하의 칼바람에 온몸이 덜덜댔다. 이씨가 오토바이로 출근하는 이유는 매달 10만원 정도 지출되는 대중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강추위를 견뎌서 아끼는 돈은 6만원 수준이지만 매달 100만원 정도를 대출금 상환에 쓰는 이씨에게는 한푼이 소중하다.
이씨는 최근 난방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0만원 수준이던 난방비가 30만원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씨는 “물가가 오를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해왔다”며 “이미 생활에서 줄일 수 있는 비용은 다 줄였는데 뭘 더 포기할 수 있는지 고민이 들었다”고 말했다.
처음 포기한 것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였다. 월급 200만원 중 대출 상환금 100만원과 휴대폰 비용, 대중교통비, 각종 관리비, 최소한의 식비 등 고정 지출을 빼면 이씨가 쓸 수 있는 돈은 약 30만원. 유가 상승과 함께 밥값이 오르자 외식을 포기했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도 절반으로 줄였다.
취미로 하던 운동을 끊고 휴대전화 무제한 요금제를 알뜰 요금제로 변경했다. 최근 난방비 고지서를 받아든 뒤엔 ‘따뜻한 출근길’까지 포기했다.
이씨는 “고정 지출이 큰 사람들에게 난방비와 같은 기초생활 비용 상승은 생활 수준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 오피스텔에서 사는 프리랜서 작가 류모씨(36)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초겨울 2만원 수준이던 난방비는 12월 7만2660원으로 올랐고, 지난달에는 14만3660원으로 껑충 뛰었다. 류씨는 늘어난 지출을 메꾸기 위해 매주 다니던 발레 학원을 포기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발레와 무용 관련 포스팅을 올릴 정도로 즐겨온 취미활동이었다.
류씨는 “당장 밥을 굶을 만큼 가난한 건 아니지만 고정 비용 지출인 만큼 어딘가에서 소비를 줄여야 했다”며 “고질적으로 손목이 아파 받던 치료도 줄일 예정”이라고 했다.
난방비가 걱정돼 집에서도 춥게 지내야 하는 상황에 좌절한다는 반응도 있다. 직장인 윤모씨(29)는 “나름 열심히 사는 거 같은데 따뜻하게 자는 것조차 맘 편히 결정 못한다는 게 슬프다”고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씨(30)는 “주말에만 쓰는 집인데도 난방비가 25만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금액이 예상보다 많이 나와 온도를 평소보다 4도 가까이 내려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방비 대란은 삶이 더 팍팍해질 것이라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가파르게 상승한 12월 도시가스 요금 고지서는 마지막 보루이던 ‘공공요금마저 올랐다’는 점에서 국민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직장인 이모씨(29)는 지난 설날 친척들끼리 모여 한참 난방비 얘기만 한 게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고지서를 보고 놀란 할머니께서 앞으론 낮에 난방 안 틀고 따뜻한 경로당에 가시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아직 12월 난방비 고지서를 받아보지 못해 불안하다는 자취생 김지연씨(28)는 “요즘 물가가 왜 이런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씨는 최대한 식비를 줄여보려고 배달을 줄이고 집에서 해먹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마트에 가서도 한 봉지에 6000~7000원인 감자나 양파를 보면 집을 수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