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태원 참사 100일, 망각에 맞서 기억하려는 시민들

이태원 참사 100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한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이태원 참사 100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한 시민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쥔 이들은 사회적 재난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국가 기능의 실패 탓이어도,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떠안은 피해자와 유족들은 잠시의 관심이 지나면 세월의 침묵 속으로 침잠하길 강요받는다. 이 같은 폭력의 관행은 지난해 10월29일 밤, 당국의 안전관리 실패로 이태원의 비탈진 골목에 축제 인파가 쏠리면서 159명이 숨진 인재 이후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5일이면 참사 100일째, 희생자 분향소의 흰 국화마저 얼어붙는 차가운 길 위에서 유족들은 여전히 정부에 공식 사과와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책임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며 벌어진 일이다.

이태원 참사는 정부의 중첩된 실패가 낳은 결과다. 검찰 공소사실을 보면 서울 용산경찰서장은 인파 운집에 대비하지 않았고, 당일 참사 발생 105분 전부터 무전을 듣고도 귀로 흘렸다. ‘주최자 없는 행사’라던 용산구청장은 보고부터 대응까지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경찰 특별수사본부의 74일 ‘셀프 수사’는 이들을 비롯한 6명만 구속 기소하는 데 그친 ‘꼬리 자르기’였다. 경찰을 지휘하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당일 행적이 묘연한데도 조사 한 번 받지 않았고, 국회 국정조사에선 “제가 그사이에 놀고 있었겠냐”며 사퇴를 거부했다. 윤희근 경찰청장도 무혐의 처분됐다.

대통령을 비롯해 법조인 출신으로 채워진 윤석열 정부는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집중하며, 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정무적 책임’은 외면했다. 국정 총책임자인 대통령이 참사 직후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도 정작 유족을 만나 위로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생경한 정치 문법은 공동체의 감수성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밑바닥에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큰 타격을 입은 박근혜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집권 여당에서 잇따랐던 막말도 같은 맥락이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반복적 2차 가해 발언은 온라인상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하는 혐오 발언을 부채질했다. 유족들이 협의체를 만들자 한 여당 중진은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 시민단체의 횡령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비방했다. 정권 기조가 이럴진대 경찰 수사에서든 국정조사에서든 참사 원인이 제대로 규명될 리 만무하다. 유족들이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망 시점과 사인, 시신의 이송 경로 등 개별 희생자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를 확인하는 일은 희생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의 출발점이다.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고 유사한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연대한다. 피해자와 유족을 침묵시키려는 혐오와 2차 가해에 맞서, 이들의 손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참사를 함께 기억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의 안전을 개선할 길이자, 미래 세대를 대규모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기억하고 연대하는 한 이태원 참사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정의는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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