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산업 호황과 ‘관계 맺음’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낯선 이와 대화해 본 적 있나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교류 기회를 놓치고 있진 않나요?
최근 ‘외로움 산업’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코로나19로 외로운 사람이 늘면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들이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집에서 낯선 사람들이 모여 단란하게 파티 음식을 나누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저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멍하니 있다가 문득 어떤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퇴근 시간 지하철에 가득한 직장인들은 사진 속 즐거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과 달리 이쪽 낯선 사람들은 각자 지치고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셰리 터클은 <Alone Together>라는 책에서 오늘날을 “다 같이 외로운 시대”라고 부릅니다. 지하철에 앉은 저는 생각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많고 다 같이 외로운데 서로 말 걸지 않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도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이 시대에 왜 ‘외로움 산업’은 호황일까? 오늘 레터에서는 외로움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하철 옆자리 사람에게 말 걸기
독자님은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기 휴대폰 떨어졌어요” 같은 말 말고, “이야, 모자가 멋지네요” 같은 시시껄렁한 말이요.
조 코헤인이 쓴 책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은 읽는 내내 계속 “지하철 옆자리 사람에게 말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니컬러스 에플리는 현대인들이 “기차부터 택시, 비행기, 대합실까지 낯선 이들은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를 완전히 무시하며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 무슨 물건처럼 대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실에 구멍을 내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주변 사람들을 물건처럼 대할까요? 두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습니다. 위험성,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사회규범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이유들이 잘못되었거나,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는데요. 저자는 위험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교류를 끊는 쪽이 더 위험하다고 강조합니다. 평생 빗장공동체를 연구해온 인류학자 세타 로는 이런 예방조치가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오히려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강력하게 빗장을 걸수록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기 때문이죠.
이어 낯선 사람에게 섣불리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사회규범이란, 쉽게 말해 “나만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것 같다”는 분위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민적 무관심’을 지키며 이어폰과 스마트폰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로 지하철에서 말을 거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한 실험에 따르면 통근열차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을 때 평균 14분 이상 대화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조 코헤인은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세계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기분 좋게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낯선 이와의 교류는 ‘행복’뿐 아니라 ‘놀라움’도 줍니다. 저자 역시 이 책에서 다양한 낯선 사람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데요. 그는 낯선 이들이 잔뜩 모인 회의장에서 서로 수다를 떨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순전한 놀라움을 느껴본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우리는 평소 대체로 익숙한 사람들만 만나기 때문이죠.
■단, 규칙은 필요해
소통·만남에 돈을 지불하는 시대
때론 스스로 세운 장벽에 고립돼
지레 겁먹어 걸어놨던 빗장 풀고
의도된 안전한 모임 울타리도 넘어
상대를 존중하는 ‘진심’ 더해지면
커다란 환대와 도움, 소속감까지
예상 못 한 행복이 찾아오진 않을까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과 경이로움을 가져다주지만, 실제 말을 걸 땐 문화권이나 상대에 맞는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쪽에서도, 상대방이 위험한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죠. 마치 동물들이 처음 만났을 때 면밀하게 서로를 냄새 맡으며 살피듯요.
인류학자 윌 버킹엄이 쓴 책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의 조심스러운 ‘약속’ 쪽에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먼 옛날부터 인류는 ‘낯선 사람’을 어떻게 맞아들일지에 대해 자세한 규칙을 만들어왔습니다. ‘과연 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상세한 의례를 통해 확인한 것이죠. 예를 들어 옛날 몽골 초원지대에선 손님이 찻잎을 씹는 법을 정해뒀고 침대에서 손님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는 규칙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까다로운 의례에 대해 험프리는 “의심을 가라앉히는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까지 손님맞이가 번거롭다면 그냥 서로 빗장을 걸어 잠그고 만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든 주인이었다가도 손님이 될 수 있고, 도움을 주었다가도 훗날 곤란을 겪을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는 “신뢰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거나 보장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장 없이 삶을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라며 “언제 어떻게 타인을 신뢰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까다로운 기술이다. 그러나 신뢰를 거부하고 모든 가능한 관계를 거부하면 취약함 속에 홀로 남게 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낯선 도시로 훌쩍 떠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그는 10대 시절 파키스탄에 머물 때 넘치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자가 호텔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이틀간 바깥에 나오지 못하자, 몇 번 들렀던 허름한 식당의 주인이 직접 의사에게 데려다주고 약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런 체험들이 그의 신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친절할 리는 없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주변 사람에게 친절하게 굴지만 미얀마에서 머물 때 괴상한 음식 세례를 받기도 하고, 일부 이웃은 끝까지 외국인인 저자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는 위험도 보상도 큽니다. 그럼에도 만약 저자가 그런 ‘작은 악의’에 지레 겁을 먹고서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근 채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면, 과연 그 수백 배의 커다란 환대와 도움, 소속감, 즐거움을 즐길 수 있었을까요?
■‘자기중심적 외로움’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낯선 사람과의 교류는 꽤 섬세한 눈치와 협상 스킬이 필요한 문제죠. 거절당할 위험 등도 스스로 감수해야 하고요.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의 <외로움의 철학>은 이러한 도전에 따르는 ‘책임감’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메시지를 간추리자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관계에 따르는 위험, 부담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에도 다양한 종류가 존재합니다만, 여기서 스벤젠이 주목하는 종류의 외로움은 ‘자기중심적 외로움’입니다. 타인을 나와 사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고, 단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도구’로만 보는 것이죠. 저자는 외로운 현대인의 상당수가 이런 자기중심적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거절당하지 않고 내게 편한 관계만을 유지하려는 ‘사회적 완벽주의’ 안에서 사람들은 철저한 외로움과 돈을 주고 산 교류 사이를 오갑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교류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상자’ 같습니다. 상자를 열었을 때 과자(기쁨)가 나올 수도 있고, 텅 비어 있거나 위험한 물건이 있을 수도 있죠. 일단 상자를 열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외로움 산업’의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과자가 들어 있는 쪽의 상자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닐까라고요.
지하철 옆자리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낯선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계속 거절당하거나 모욕, 습격당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나름의 눈치, 예의도 갖춰야 하죠. 하지만 외로움 산업의 소비자가 되면 나는 내가 편한 시간에, 나와 말할 의사가 있는, 비슷한 수준의 ‘안전한’ 사람들과 시간을 ‘깔끔’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같이 있기 싫거나 위험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손쉽게 ‘차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큰 놀라움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관계가 내가 일방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과자 선물’ 같은 것이 아닌, ‘둘의 문제’라고 여긴다면 각오를 하고 상대를 동등한 존재로 대해야겠죠. 그렇지 않다면 외로움도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처럼 낯선 사람과의 교류를 계속 회피하게 될 경우, 이처럼 타인과의 ‘교류 스킬’ 자체를 단련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이 높을수록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들은 점차 서로의 차이를 ‘협상’하고 ‘번역’하며 낯선 사람들과 공존하는 방식을 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차이를 갖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맺음말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식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이전엔 ‘혼밥’이라는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당연히 혼자 와서 밥이든 술이든 먹었기 때문에 ‘혼밥’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는 거죠. 걸어서 며칠은 걸릴 만큼 멀리 사는 친구와 ‘고작 밥 먹자는 약속’을 잡을 수 없었으니까요.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혼자’ 와서 그 펍에서 동네 사람, 나그네, 주인과 함께 어울리며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연락 수단이 다양해지고 외식의 개념이 널리 퍼지면서 식당에선 ‘의도된 관계’끼리만 말을 하고 밥을 먹게 되었죠. 마치 그 테이블 근처에만 동그란 유리막이 씌워져 있는 것처럼요.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매일 모턴홀에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노동계급 아일랜드인 및 독일인 이민자들, 말하자면 푸주한, 목수, 마부들”과 함께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편견을 씻어낼 수 있었다고 하죠.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간해선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의 낯선 사람과 우연히 친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습니다.
‘외로움 산업’이 호황인 이유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지불하고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 유료 독서모임, 원데이 클래스에 종종 참여하며 사람들을 기쁘게 만나고 있습니다.
다만 옛날부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유료 모임에 참여할 만한 돈과 여유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는 아예 관심사나 생활 반경이 다른 사람들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행복감, 놀라움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선 의도된, 안전한 모임의 울타리를 넘어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과도 서로 대화하고 알아가는 것 역시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제공해주는 ‘관계 서비스’가 아니라 서로가 모두 노력하면서요.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