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산책할 때 겪는 ‘무례’
길거리 캐스팅의 명가 귤엔터 소속 반려견 연습생 열여덟 멤버 중 이제 마지막 멤버 오렌지만이 남았다. 가장 최근 가족을 찾은 레몬이는 작년 11월, 임시보호자들이 입양을 결심하며 반려견 데뷔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레몬이의 가족은 오랫동안 대형견을 반려해본 경험이 있었고, 개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이들이 입양을 망설였던 이유를 듣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에서 큰 개랑 다니면 부당한 일을 많이 겪게 되잖아요. 지난 10여년간 큰 개를 키우면서 정말 별소리를 다 들었어요. 면전에 대고 몇 인분이다, 맛있겠다는 말도 수없이 들었죠. 레몬이랑 살면 앞으로 또 10여년을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할 텐데, 선뜻 결정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반려견 금배는 말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개이다(왼쪽 사진). 금배를 ‘개모차’에 태워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던 시절. 바퀴로 갈 수 있는 길이 끊겨있거나 돌아가는 길이 많아 소요 시간을 몇 배씩 계산해 다녔다.
실제로 우리는 귤멍멍이들의 입양자들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개의 특성이나 교육하는 방법 외에도 길 가다가 시비 거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지도 알려주곤 했다. 개와 산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바깥에 나가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필연적으로 무례한 사람을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도심에서 작고 하얀 강아지가 아니라 중대형 믹스견과 걷는다면 그 확률은 더 높아진다. 실제로 최근에 귤멍멍이 가족들이 길 가다가 시비를 당해 당황스럽고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마음이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에 개를 반려한다고 했을 때 이런 것까지 각오해야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면전에 대고 몇 인분…맛있겠다
큰 개와 다니면 별소리 다 들어”
부당 대우 알기에 입양 망설이기도
혼자 산책시킨 경험담 들어보면
여성이고 어려보일수록 더 심해
반복되니 방어 태세 갖추게 돼
자신의 불편함이나 무서움 이유로
어떤 공간서 ‘치울 수 있다’는 발상
그 공고한 확신 안에 차별이 있어
반려견도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
함께 어떻게 잘 살지를 이야기해야
우리도 개와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말을 걸어도 되는 존재,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것이 일상이다. 다행히 이제는 요령이 생겨 별것 아닌 말에는 손으로 ‘쉿!’ 하고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중대형견 보호자들이 개와 함께 산책하거나 반려견 동반 공간에 들어갈 때 마주치는 무례한 일들은 대개 비슷할 것 같다. 개가 지나가면 ‘웍!’ 하고 놀라게 하거나 사람이나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들, 친구들끼리 장난이랍시고 한 명을 일부러 개 쪽으로 툭 미는 사람도 많다. 차분하고 조용히 산책하는 개를 자극하고 놀라게 한 뒤 유희 거리로 삼고 사라진다. 그러면 덩그러니 남은 우리는 놀란 개에게 나쁜 기억으로 학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갑자기 만지려고 하는 사람을 제지하면 십중팔구 “물어요?”라고 묻는다. 그냥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쉬고 싶은 것인데, 사납냐고 도리어 물을 때의 당혹감이란. 아마 행위의 주체자인 인간이 강아지를 만지고 싶으면 당연히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개가 이렇게 큰데 입마개 왜 안 했냐.” 최근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런 것이다. 소위 개 물림 사고가 언론에 회자되면서 ‘큰 개는 사나우니 입마개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비반려인 사이에 널리 퍼진 것 같다. 법적으로 입마개를 해야 하는 견종이 아니라고 답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소용이 없다. 그래봤자 ‘내가 무서우니까 입마개를 해야 하는 맹견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노력을 해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경우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거나 손짓으로 ‘그냥 가시라’고 휙휙 내젓고 만다. 그런 것들로 금배와 산책하는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의점 앞을 지나는데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보신탕거리가 지나가네’라고 한다든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개들을 데리고 등산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아저씨가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라고 한다든지. ‘쭙쭙’거리며 끈질기게 개의 시선을 끌려고 하기에 하지 말라고 했더니 ‘내가 예뻐해주겠다는데 계집년이 왜 못하게 하느냐’는 소리라든지. 산책을 마치고 반려견 동반 카페의 야외 자리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데 뒷좌석에서 요즘에는 개들이 사람보다 대우받는다며 혀를 찬다든지. 느닷없이 누군가 다가와 개 데리고 다니지 말고 애를 낳아서 나라에 이바지하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 간다든지 하는 일들에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금배와 가능한 한 더 많은 곳을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고대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는 두 사람이 같이 산책을 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 그치지만, 혼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당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엄청나다. 산책시키는 사람이 여성이고 어려보일수록 더 심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무례한 상황에 우리는 개 줄을 잡은 사람이 마동석이어도 과연 똑같이 말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곤 한다. 처음 금배와 살게 되었을 때에는 산책 때마다 신난 금배를 보며 웃고 다녔는데 이젠 사람들이 말을 걸까 봐 일부러 우환이 쌓인 사람처럼 인상을 구기고 걷는다. 모르는 친구들은 왜 그렇게 산책할 때마다 화가 나 있냐고 묻지만,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방어적으로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는 동네 공원을 금배와 산책하는데 마주 오던 사람이 우뚝 멈춰서더니 “개 좀 치우세요”라고 말했다. 개가 무서운가보다 싶어, 그렇지 않아도 바투 잡은 줄을 더 짧게 잡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큰 개들을 공원에 데리고 왔다고 씩씩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개 좀 치우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었다.
사실 일상 속에서 보행자는 개보다는 자동차로 인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더 높다. 순식간에 보행자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는 자동차가 거리와 골목을 활보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누구도 ‘자동차를 치우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감히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고 화를 내거나 걸어 다니라고 대뜸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도 않는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어 실제로 공포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 자동차가 보행자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정말 자동차를 무서워한다고 할지라도 자동차가 일상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곤 하는 강력 범죄사건 피의자의 95%가 남성이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유로 ‘무서우니 남성을 치워주세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남성은 당연한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좀 더 쉽게 상상해보자. 당신이 길을 가다가 좁은 길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폭력 집단을 마주쳤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들에게 굳이 말할 수 있을까? ‘제가 무서우니까 비켜주세요’라고. 정말 무섭다면 아마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비켜갔을 것이다. ‘개를 치워라’ 또는 ‘개가 무서우니까 치워 달라’는 말의 기저에는, 사실은 자신이 개를 치우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맞은편에 있는 존재를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몇 년간 논란이 되어온 ‘노 키즈 존’의 발상과 닮아있다. 어떤 공간 안에서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를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이를 당연한 일상 속 구성원이 아니라 치울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서울 지하철 시위와 관련하여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장연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고 사회적 강자’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공간을 함께 사용해도 된다, 안 된다’를 결정하는 사람과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사회적 강자인지 되묻고 싶다. ‘불편하니까 사라져주세요’라고 말할 권한이 있는 사람, 그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은 과연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개나 어린이, 장애인은 자동차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의 일원이었다. 고작해야 10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자동차에 대해서는 일상 속에서 보행자와 공존하기 위한 수많은 규칙을 만들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것에 비해, 왜 어떤 존재들에 대해서는 공존의 방법을 찾기보다는 배제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우리는 당연한 사회 구성원인 개와 어린이, 장애인과 일상 공간 속에서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지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생각해본다. 백인들의 자리에 ‘감히’ 앉아있는 로자 파크스가 자리에서 비키라는 요구에 저항하면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울 때 버스에서 흑인을 치워버리려 했던 백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흑인 민권 운동의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을까? 지금은 그 불편함보다 흑인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우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사실 대부분 사람은 어린이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장애인에게 이동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반려견은 존중받아야 하는 생명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차별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불편함이나 무서움을 이유로 어떤 존재를 공간에서 치우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이 타인의 존재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공고한 확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확신 안에 차별이 있다.
▶귤엔터 이사진 : 구낙현·김윤영·금배
MBTI가 ENFP인 사람, INTJ인 사람, 그리고 말이 없는 강아지 금배로 이루어진 팀이다. 매일 산책하는 금배와 더 행복하게 걷기 위해 최근 제주로 이주했다. 걷다가 만난 마당개와 들개의 새끼들을 길거리캐스팅하며 ‘제주탠져린즈’라는 반려견 연습생 그룹을 꾸렸다. 지금은 이들의 소속사 귤엔터로서 반려견으로 데뷔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강아지 금배와 걸으며 만난 제주의 자연과 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한다.